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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축구(Calcio Italiano)/세리에A

일하는 자들의 왕국 - NOVARA


노바라는 55년 동안 하부리그를 계속 떠돌아다녔다

노바라의 창설은 1908년. 시내의 고등학생이 중심이 돼서 축구클럽을 만든 것이 그 시초였다. 국내리그가 통일된 1929-30시즌 이후 이 팀이 세리에A에 소속되었던 것은 현재가 13번째다.

과거에는 이 클럽에도 ‘황금시대’가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던 시기의 일이다. 실비오 피올라를 앞세운 노바라는 47-48시즌 세리에B에서 우승했고 8년에 걸쳐 세리에A에 머물렀다.

피올라는 세리에A 역대 1위인 274골을 넣은 ‘전설의 공격수’다. 고향 팀, 프로 벨체리에서 데뷔한 뒤 라치오, 토리노, 유벤투스를 거쳐 노바라에 입단한다. 입단했을 당시는 34세. ‘현역생활의 마지막을 즐기기 위해 왔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한 연령이다.

하지만 그는 평범한 남자가 아니었다. 이적 첫해에 팀을 세리에A 승격으로 이끌었고 40세의 나이로 은퇴하기까지 세리에A에서 6시즌동안 싸웠다. 그가 18골을 넣었던 51-52시즌의 8위가 지금도 깨지지 않은 노바라의 최고 순위가 되었다.

96년에 피올라는 고향 벨체리에서 그의 83년간의 생애를 마쳤지만 1년 뒤 노바라 시는 그에게 경의를 보이며 그때까지 ‘비알레 케네디’라고 불렀던 시 직영 스타디움을 ‘실비오 피올라’라고 개명했다.

하지만 피올라의 은퇴와 함께 노바라의 화려한 시대도 끝났다. 피올라가 은퇴하고 2년 뒤인 55-56시즌에 세리에B로 강등. 그 이후 2011년까지 그들이 세리에A의 무대로 복귀하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즉, 노바라는 55년이라는 세월동안 하부리그를 계속 전전했던 것이다.


프로빈챠의 팀으로서는 파격적인 트레이닝 시설

노바라가 칼치오의 표면 무대로 복귀한 계기가 되었던 것은 2006-07시즌 중반에 팀의 경영권이 이탈리아 북서부에서 복수의 대 병원을 운영하는 ‘몬자 종합병원 그룹’의 톱 데 살보 패밀리의 손으로 위임된 이후부터다.

새로운 체제가 들어선지 3년째인 2009-10시즌, 아틸리오 테세르를 새로운 감독으로 맞이한 노바라는 프리마 디비시오니(구 세리에C1)에서 쾌진격을 보이며 세리에B로 승격을 확정지었다.

노바라에게 있어 세리에B 복귀조차 33년만의 쾌거다. 하지만 쾌진격은 멈추지 않았다. 지난 시즌은 개막 대쉬에도 성공해서 10라운드부터 연말까지 선두를 유지. 후반기에 들어와 기세는 줄어들었지만 최종성적은 3위. 이 시점에서 ‘승격조’로서는 100점 만점의 활약이었지만 승격 플레이오프에서 레지나와 파도바를 격파하며 설마 했던 세리에A 승격을 확정지었다.

플레이오프의 최종전이 벌어졌던 6월 12일, 파블로 곤잘레스와 말코 리고니의 골로 파도바에게 2-0으로 승리를 거두며 승격이 확정되자 노바라의 거리에서는 밤새도록 축제에 취하기도 했었다.

데 살보 패밀리의 성공의 비밀은 ‘본업’인 종합병원경영의 노하우를 칼치오의 세계에 주입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이 내건 큰 핵심은 2개. 첫 번째는 ‘시설의 정비’이며 또 하나는 ‘우수한 인재의 등용’이다. 적절한 설비투자 없이 매년 경쟁이 격화되는 의료의 세계에서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아무리 설비가 충실하더라도 우수한 스태프가 없으면 보물을 가지고도 썩히게 된다. 좋은 설비와 인재. 이 2가지가 맞아 떨어졌을 때 의료현장은 비로소 기능하는 것이다.

클럽매수 이후 패밀리가 우선 눈을 돌렸던 것은 팀의 트레이닝시설을 일신하는 것이었다. 노바라의 중심부에서 7km. 이탈리아의 유일한 쌀 산지이기도 한 이 지방 특유의 전원풍경 속에 그 시설이 있다. ‘노바렐로 빌라지오 아주로(novarello villaggio azzurro)’, 통칭 노바렐로. 작은 프로빈챠 팀으로서는 파격적인 규모의 트레이닝 시설이다.

클럽하우스의 앞에서 도는 큰 수차는 이곳이 17세기까지 제분을 실시하던 농사일을 했던 곳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그 이후에는 디스코와 바로서 사용되었지만 2007년에 클럽이 매입하며 연습시설이 되었다.

약간 작은 감은 있지만 설비는 매우 충실하다. 정규 규격으로 만들어진 축구장이 4면이며, 그중 2면은 인공잔디다. 미니축구장이 2면. 그 외에 600평방미터의 넓이를 자랑하는 다종다양한 트레이닝 도구가 갖춰진 체육관, 자쿠지(물에서 기포가 생기게 만든 욕조)가 달린 샤워실, 비치사커장, 업룸 등 축구 이외의 스포츠 합숙에도 대응할 수 있는 설비가 되어 있다.

같은 부지 내에는 호텔이 병설되어 있다. 49개의 방, 최대 76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노바라의 선수들은 홈경기 전날에 이곳에서 숙박한다. 클럽하우스의 트레이닝은 팀 관계자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들도 이용할 수 있게 되어있다. 다양한 종류에서 선택할 수 있는 런치는 파스타, 메인 디시, 음료를 포함해서 12유로. 나와 카메라맨이 먹었던 것은 베이컨과 루꼴라의 펜네와 송아지 보콘치니. 고급 레스토랑과 비슷한 퀄리티이며 12유로라면 대만족이다.

시설의 옆에는 대규모의 공사가 시행중이며 뭔가 또 하나의 큰 건물을 건축 중이다. 클럽의 광고담당 프란체스카 쥬스티에게 물어보자 이런 대답을 들었다. “새로운 호텔을 짓고 있습니다. 우리는 노바렐로를 클럽만의 시설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장래 적으로는 이곳에 많은 스포츠 팀을 유치해서 합숙소로서 이용해줬으면 합니다. 그걸 위해서는 수용인원수가 부족하기 때문이죠. 작년에는 노바라의 야구팀이 이곳에서 합숙을 실시했습니다. 노바렐로의 유효이용도 우리들의 중요한 경영전략의 하나입니다.”


인공잔디를 사용하는 것도 실비오 피올라의 큰 특징

데 살보 패밀리의 다음 목표는 ‘진짜 전장’인 스타디움의 처리다. 이번 여름 유벤투스가 자신만의 새로운 스타디움을 갖게 된 것은 알고 있는 대로이다. 데 살보의 최종목표는 유베처럼 스타디움을 자신들의 소유하고 과거에는 1만 명으로 제한되었던 수용인원을 이번 여름 ‘강행공사’로 어떻게든 만7천까지 늘렸다. 하지만 55년만의 A승격에 노바라의 거리는 크게 고조되었고 그럼에도 비좁은 감은 부정할 수 없다. 9월 20일, 시즌 첫 홈경기인 인테르 전에서는 예매 단계에서 티켓이 매진되었다. 나가토모 유토와 모리모토 다카유키의 ‘일본인 더비’를 관전하기위해 왔던 많은 일본인 축구팬이 티켓을 입수하지 못하는 사태도 발생했다. 향후 이 인기가 계속되도록 수용인원을 한층 더 확장해 나갈 필요가 나온 것이다.

인공잔디를 사용하는 것도 ‘실비오 피올라’의 큰 특징이다. 현재 인공잔디의 피치를 가진 스타디움을 홈으로 삼고 있는 것은 노바라와 체세나 2팀뿐. 그럼에도 노바라의 대단함은 세리에B에 승격된 2010년 여름의 시점에서 인공잔디로 교체할 것을 결의했던 것이다.

2년 연속의 승격을 실현시킨 공로자, 테세르 감독이 말했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인공잔디의 디메리트는 전혀 없습니다. 물론 천연잔디와이 차이는 있죠. 그건 홈이 보다 빠르게 ‘달릴 수 있는’점입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 특색이지 결점이 아닙니다. 관리는 간단하고 비용면에서도 뛰어납니다. 인공잔디는 앞으로 좀 더 채용될 겁니다”

노바라에 온지 3년째가 되는 알바니아대표 GK 사미르 위카니도 인공잔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GK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실비오 피올라의 잔디가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확실히 천연잔디와는 약간 다르죠. 비가 와서 물을 머금었을 때 등, 반동이 대단해요. 하지만 저는 이제 익숙해졌으니까요. 다른 스타디움의 천연잔디보다도 플레이하기 쉬워요”


노바라는 키에보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방금 전 나는 현재 노바라의 경영방침에는 설비투자와 인재의 충실이라는 2가지 축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경영의 두 바퀴의 배후에 또 한 가지 그들의 중요한 철학이 있다. 그것은 ‘신장에 맞는 경영을 한다’라는 것이다.

이번 시즌, 노바라의 선수들에게 지급되는 연봉 총액은 980만유로. 이것은 세리에A 20팀 가운데 압도적인 최하위이다. 덧붙여서 1위 밀란의 1억 6천만유로. 19위 레체에서도 1380만 유로이기 때문에 압도적인 ‘저비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추가로 말하자면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가 받고 있는 연봉은 900만 유로이기 때문에 노바라의 연봉총액과 거의 비슷하다.

이번시즌 개막 전, 노바라에서 대표이사직을 맡고 있는 마시모 데 살보는 세리에A로 올라왔어도 클럽의 경영방침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중요한 것은 경영의 건전성을 유지해서 팀을 강화시켜나가는 것. 연봉총액이 수입의 60%를 넘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들은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를 이해하고 있죠. 세리에A의 상위에 진출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 경영방침을 바꾸는 것은 주객전도죠.”

이 코멘트를 들으면 과거의 노바라는 과거 이탈리아축구계에 선풍을 불러일으킨 키에보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연봉총액이 1420만유로인 키에보지만 세리에A로 막 올라왔을 때는 압도적으로 적은 예산으로 팀을 운영했었다. 하지만 그들은 2001년 여름에 처음으로 승격된 이후 2007-08시즌 1년을 제외하면 항상 세리에A의 지위를 계속 지켜왔다. 빵과자 제조회사를 경영하는 루카 캄페델리회장은 선대 회장인 아버지에게서 항상 “칼치오에게 회사를 먹혀버려서는 안 된다”라고 들어왔던 것이다.

칼치오의 세계에서 건전경영을 유지하며 결과를 내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다. 과거 국내외에서 많은 타이틀을 손에 넣어왔던 파르마는 이전에는 약소 프로빈챠레(지방 클럽)에 불과했었다. 그들이 타이틀을 노릴만한 팀이 되었던 것은 유제품메이커 대기업인 ‘파르마라트’를 경영하는 탄치 패밀리에게 받은 윤택한 자금이 있었기 때문이다. 탄치도 처음에는 신장에 맞는 경영을 생각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팀이 좋은 성적을 남기게 되면 한층 더 위를 목표로 하고 싶어지는 것. 비대한 야망은 머지않아 폭주하게 되었고 마지막에는 파멸을 불러왔다. 땅에 발을 붙인 채로 높은 곳으로 손을 뻗는다 ― 칼치오 계에서는 특히 어려운 일이다.


노바라는 자신들의 스타일로 칼치오 계에서 살아가고자 한다.

마우로 페데르촐리SD가 말했다. “노바라처럼 작은 클럽이 칼치오의 세계에서 성공을 거두기위해서는 우선 자신들이 가진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최대한으로 살릴 수밖에 없습니다. 팀의 강화를 위해 물 쓰듯이 돈을 사용한다면 즉시 파산해버릴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보강을 전혀 하지 않는다면 강한 팀은 만들 수 없습니다. 밸런스에는 항상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죠.”

그러면 최소한의 자금으로 우수한 인재를 확보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은 것일까. 그들의 방침론은 ‘경영은 경영의 프로에게, 축구는 축구의 프로에게’다. 팀은 테세르 감독에게, 보강은 파스쿠알 센시빌레(전임 SD, 현재는 삼프도리아GM)및 페데르촐리에게 맡긴다. 그런 뒤 만개하기 직전의 선수를 찾는 것이다. 파블로 곤잘레스, 크리스티안 벨타니, 마르코 리고니, 카를라벨토 루디 등 싼 금액으로 노바라에 와서 재능을 개화시킨 선수는 많다.

이번 여름, 카타니아와의 공동소유라는 조건으로 노바라로 이적한 모리모토도 그런 클럽의 방침에 맞는 선수라고 봤기 때문에 영입한 선수다. 페데르촐리SD가 모리모토 영입에 대해 말해줬다. “모리모토를 영입하자고 클럽 측에 제언했던 것은 접니다. 최근 몇 년간 쭉 주목하며 봐왔죠. 센터포워드로서도 2선공격수로서도 뛸 수 있는 타입이고 테세르 감독의 축구에 맞는 선수라고 생각했습니다”

데 살보 대표이사 역은 그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떤 팀을 육성하고 싶냐구요? 아니, 우리가 하나의 모델케이스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요, 칼치오계의 다양한 사건을 힌트로 삼으면서요”

오랫동안 팀을 지탱하는 반디에라 라파엘 루비노가 말했다. “제가 처음으로 노바라의 유니폼을 입었던 것은 2001년입니다. 당시에는 세리에C2(4부)였죠. 확실히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모든 것은 지금의 오너가 팀을 매입한 이후부터 시작되었죠. 연습설비의 개선, 성적의 향상, 거기에 맞춰 팬들도 스타디움으로 돌아왔습니다. 힘든 시절을 아는 제게 있어서는 아직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에요”

칼치오메르카토에 얼마나 돈을 쏟아 붓느냐가 클럽의 우열을 정하는 시대는 끝났다. 아니, 그런 시대는 처음부터 없었을지도 모른다. 노바라는 자신들의 스타일로 칼치오계에서 계속 살아남으려 하고 있다. 물론, 위대한 프로빈챠레가 될 것인지, 일정기간동안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뒤 사라져갈지는 향후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

출처 : 월간 칼치오2002 2012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