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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축구(Calcio Italiano)/세리에A

루트를 찾아서 - Ezequiel LAVEZZI(산타페의 태양처럼)


명문 보카의 유스에 들어갔지만 한번은 엘리트로 가는 길에서 드랍아웃되었던 에제키엘 라베찌.
3부에서 기어올라온 그가 겨우 당도한곳은 영웅 마라도나가 사랑했던 항구도시의 클럽이었다.

text by Chizuru de GARCIA
cooperation by Mariano DAYAN, Diego MACIAS


금발의 스트라이커를 동경하며

가브리엘 바티스투타와 하비에르 마스체라노, 그리고 리오넬 메시같은 유명한 선수를 배출하고 우수한 축구선수의 산지로 알려진 산타페주. 에제키엘 라베찌 또한 아르헨티나대표의 유니폼을 입은 산타페시노(산타페출신)중 한명이다. 1985년 5월 3일, 비야 고베르나도르 갈베스시의 콜로넬 아기레지구에서 에제키엘은 태어났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냉동축산물을 취급하는 회사에서 일하고있었고 생활에 부자유스러움은 없었다. 하지만 에제키엘이 아직 어렸을때 양친은 이혼해버렸다. 아버지가 떠난 가정에는 적막함만이 남았고 어머니 도라는 병으로 자리에 누울정도로 쇠약해졌다. 이때부터 에제키엘보다 10세연상인 형 디에고가 집안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고 어머니를 간호하면서 동셍 에제키엘과 여동생 발레리아를 보살피게되었다.

양친의 이혼으로인해 쓸쓸한 추억은 있지만 언제나 밝은 미소를 잃지않았다

에제키엘과 축구공과의 만남은 5세때. 근처에 있는 클럽 '솔 나시엔테'에서 베이비풋볼(5인제 실내축구)을 하게되었다. 12세때는 지역의 인기클럽 '콜로넬 아기레'의 주니어팀에 입단했고 본격적으로 11인제 축구를 시작했다. 주말에는 산타페주 리그의 경기에 출전했고 빠르게 스트라이커로서의 재능을 발휘. 작은 체구였지만 동년배중 누구보다도 골에 대한 탐욕이 강했고 강력한 신체를 무기로 많은 골을 넣었다.

축구에 열중하면서도 에제키엘은 학교에 가는것을 매우 좋아했었다. 집에서 겨우 5블럭정도 떨어진곳에 있었던 초등학교에서는 많은 친구들을 만들었고 그들과의 교류는 지금도 계속되고있다고한다.

"친구를 소중히 생각하는 아이에요"

어머니 도라는 이렇게 말했다.

"동료의식이 강한것이려나. 누구보다도 인기가 있었어요. 언제나 밝고 웃는얼굴을 보이지않는날이 없었죠. 친구들에게 있어서도 제게 있어서도 그 아이는 태양같은 존재였어요." 그때 에제키엘은 '포쪼'라는 별명으로 불리게되었다. 뭔가 유래도 없는말같지만 학교에서도 축구팀에서도 모두가 그렇게 부르게되었고 프로가 되고나서도 아르헨티나국내에서는 그대로 사용되었다. 형 디에고는 이렇게 말했다.

"에제키엘이라는 본명은 몰라도『콜로넬 아기레의 포쪼』라고말하면 누구나 알정도였죠." 어렸을때 마음에 들었던팀은 산타페주의 로사리오시의 강호 로사리오 센트럴이었고 자주 형과 함께 경기를 보러 스타디움까지 가곤했었다. 하지만 가장 동경했었던것은 90년과 94년 월드컵에서 활약했던 클라우디오 카니쟈다. "그의 플레이스탈을 정말 좋아했었던것같고 드리블할때도 달리는 방식이 매우 닮았었어요."라고 형 디에고는 말했다. 금발의 스트라이커의 플레이는 에제키엘의 기억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플레이에도 적지않은 영향을 가져다주게되었다.


1년동안 3번의 입단테스트

2001년, 에제키엘은 동경하던 로사리오 센트럴의 유스팀에 입단한다. 하지만, 그가 그곳에서 플레이한 시간은 매우 적었다. 준족에 득점력을 갖춘 스트라이커가 있다는 소문을 들은 어느 에이전트가 이탈리아 세리에B의 페스카라로 이적하는 협상안을 들고왔던것이다. 당시 아르헨티나에서는 이탈리아계 이민자들이 조국의 패스포트를 만드는것이 일종의 사회현상이 되어있었다. 극도의 인플레로 인해 중소기업이 차례대로 도산했던 시기이다. 얼마되지않은 남은 재산을 들고 조상들의 고향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려고했던 사람과 대학을 졸업하고도 국내에서는 직장을 얻지못하고 유럽으로 건너가는 사람이 급증했던것이다. 프로축구선수를 목표로하는 젊은이들도 이탈리아에서 운을 시험해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에제키엘은 페스카라의 테스트에 합격하고나서도 아르헨티나로 돌아가버렸다. 당시에는 아직 16세였고 고향을 떠날 결심이 서지않았던것이다. 로사리오로 돌아간 에제키엘을 다른 에이전트가 찾아왔다. 80년대에 리베르 플라테에서 플레이했던 경력을 가진 다리오 에스페란디오다.

남아공으로 가지는못했지만 바티스타정권에서는 중요한 전력.
메시, 디 마리아와 3톱을 형성한다. 

아르헨티나에서는 매년 3월부터 유스리그가 개막하기때문에 어떤 클럽이든 1월에서 2월에 입단테스트를 실시하며 이후에는 대부분 선수를 영입하지않는다. 에제키엘이 모국으로 돌아갔을때는 이미 테스트시즌은 끝나있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에스페란디오에게 권유받은 에제키엘은 산타페시의 명문 콜론의 테스트를 받았고 입단을 허가받았다. 어떤 포지션보다도 경쟁률이 높은 공격수로서, 게다가 시기가 지난 테스트에 합격했다라는 사실은 그의 실력이 진짜라는 증거일것이다.

거기에 추가로 에스페란디오는 콜론 입단을 거절하라고 말했고 국내최고의 클럽 보카 주니어스의 테스트를 받도록 권유했다. 그리고 에제키엘은 보카의 테스트에도 멋지게 합격했던것이다. 강호 보카의 유스에서 프로를 목표로한다라는 꿈에서도 보지못했던 전개에 에제키엘은 당황했다. 자연스럽고 밝은 성격은 다행히도 팀메이트와 금새 친해지는데 도움이 되었고 기숙사생활을 만끽하게된다.

하지만 보카에서는 이미 클럽의 토박이출신 선수들로 팀이 형성되어있었다. 경기에 출전하지못하는 분함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이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그러던중 어느날 당시 보카의 유스부문에서 디렉터를 맡고있었던 호르헤 그리파로부터 연습중에서 실시된 미니게임에서 오른쪽 측면미드필더에 들어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어린시절부터 공격수 이외의 포지션에서 플레이해본 경험이 없었던 에제키엘은 당연히 어색한 플레이밖에 보여주지못했다.

그리고 연습후 그리파에게 호출되어 세세한 지도를 받는동안 그는 드디어 "무너져"버렸다. 아르헨티나에서 젊은선수육성의 권위자로 불리는 그리파에게 누적된 불만을 모두 쏟아내버렸던것이다. 분노로 가득찬채 짐을 꾸려서 기숙사를 뒤로한 에제키엘은 그대로 두번다시 돌아가지않았다. 결국 그가 보카에서 보냈던 시간은 반년뿐이었다.

2008년에 메시등과 함께 베이징올림픽에 출전해서 금메달을 획득
에제키엘은 조별리그에서 2골을 넣었다. 

고향으로 돌아와서 당분간 형 디에고의 일을 도왔다. 단기간에 몇군데의 도시를 돌아다니며 낙담한 모습의 동생을 걱정했던 형 디에고가 잘못된길로 나아가지않도록 바로잡아줬던것이다. "16세인데 놀고싶었을거에요. 지금까지 쌓아왔던것을 수포로 돌리지않도록 규칙바른 생활을 계속하게하려고 생각했었죠." 아버지 대신 형에게 의지하며 에제키엘은 일에 정신을 매진하면서 고향팀 콜로넬 아기레에서 트레이닝을 계속했다.

그리고 2003년 어떤 에이전트가 3부리그 CA에스투디안테스(현재 1부의 에스투디안테스와는 다른클럽. 이하 CAE)로 입단하라는 협상안을 갖고왔다. 주전의 부상으로인해 득점력있는 공격수를 찾고있었던 CAE는게약을 맺은다음 곧바로 그를 톱팀에서 데뷔시켰다고한다. 에제키엘은 고민했지만 경기에 나가서 실력을 어필하면 어쨌든 1부리그의 클럽이 불러줄지도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걸고 CAE와 계약했던것이다.


모국의 영웅과 같은 클럽으로

정식으로 프로데뷔를 이뤄내며 꾸준하게 경기에 출전했다고는해도 CAE에서의 날들은 결코 장밋빛은 아니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산테르모지구에 있는 노후화된 선수숙소에서의 생활은 선진국과 비슷한 설비가 갖춰져있었던 보카에서의 기숙사생활과는 하늘과 땅차이. TV는 없었고 샤워실은 20명이서 공유했다. 그럼에도 에제키엘은 축구에 전념했고 적어도 1시즌은 참기로 결심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CAE에 입단했던것은 행운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형 디에고가 그렇게 말했던것은 CAE의 홈 카세로스에 헤라르도 살로리오라는 인물이 살고있었기때문이다. 그는 당시 아르헨티나대표의 총괄책임자였던 호세 페케르만의 밑에서 피지컬코치를 맡고있었던것이다. 페케르만과 그의 스탭은 새로운 재능을 발굴하기위해 아르헨티나 전역에서 눈을 빛내고있엇다. 지역 클럽에 젊고 득점력이 있는 공격수가 가세했다라는 정보를 귀로 들은 살로리오는 지체하지않고 경기를 보기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에제키엘의 소질을 꿰뚫어본 그는 페케르만에게 보고. 이렇게해서 3부리그의 스트라이커는 U-20대표에 소집되게된다.

어느날 CAE는 1부의 강호 산 로렌소와 맡붙었었다. 당시 산 로렌소의 감독을 맡고있었던 네스토르 고로시토는 에제키엘에게 흥미를 갖게되었고 경기후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스피드가 있고 드리블도 킥도 날카로웠죠. 마크를 벗겨내는 움직임도 완벽. 3부에서 플레이하고있는 선수라고는 생각할수없었어요. 그렇기때문에 과감하게『산 로렌소로 오지않겠나?』라고 물어봤습니다. 그러자 그는『에이전트와 이야기해주세요』라고 답했죠."

고로시토는 즉시 클럽의 간부에게 보고했다. 팀이 원하는 스트라이커상에 합치한다고 생각한 산 로렌소의 프런트는 에제키엘의 영입을 시도했지만 에이전트는 이탈리아의 제노아(당시 2부)에 소유권을 매각해버렸다. 하지만 제노아와의 계약에는 이탈리아로 건너가기전에 1시즌은 아르헨티나에서 플레이한다라는 조건이 포함되어있었다. 이렇게해서 에제키엘은 2004년 7월 산 로렌소로 임대이적했던것이다. 그리고나서 1개월뒤인 8월 14일에 데뷔한 작은 체구의 스트라이커는 기대했던대로 득점력을 발휘하며 일약 서포터의 인기선수가 된다. 2005년 1월에는 U-20 남미선수권에 출전헤서 메시 등과 함께 활약하며 3위입상에 공헌. 단숨에 두각을 나타냈던것이다.

산로렌소에서는 주력으로서 리그우승에 공헌.

산 로렌소에서 1년을 보내고 이탈리아로 향할 준비를 마쳤던 에제키엘에게 예상외의 소식이 날아들었다. 경기의 부정조작이 발각된 제노아가 3부로 강등되며 권리를 포기했던것이다. 그뒤 2시즌, 그는 산 로렌소에서 플레이했고 2007년에는 클라우수라(후기리그) 우승의 공헌자가 되었다. 2007년 4월에는 염원하던 A대표 데뷔도 이뤄냈다. 커리어 첫 타이틀을 획득한뒤 그는 만족감과 함께 이탈리아로 건너간다. 새로운 팀으로 선택한곳은 모국의 영웅 마라도나가 빛나는 커리어를 쌓았던 항구도시의 클럽 나폴리. 첫시즌부터 주력이 된 에제키엘은 현재 영구결번이 되어있는 마라도나의 '10번'을 계승해야한다고 말할정도의 존재가 되었다.

유명선수가 된 지금도 그는 어린시절에 아버지를 잃으며 맛봤던 괴로운 추억을 잊지않고있다. 가난한 아이들이 공부와 스포츠를 즐기면서 건전한 생활을 보낼수있도록 고향에 재단을 설립해서 형 디에고에게 그 관리를 맡겼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에제키엘이지만 작년의 남아공월드컵 소집멤버에는 이름을 올리지못하며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3년뒤의 브라질대회에서는 다시 기회가 돌아올것이다. 소년시절에 동경했던 카니자처럼 아르헨티나대표의 유니폼을 입고 월드컵에서 골을 넣는 그의 모습을 틀림없이 볼수있을것이다.

고향 콜로넬 아기레의 봉사활동에서 아이들과.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을 지원하고싶다며 재단을 설립해서 원조를 계속하고있다.

출처 : 월드사커다이제스트 2011년 5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