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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축구(Calcio Italiano)/피오렌티나(Fiorentina)

IL VIAGGIO DI ROBERTO BAGGIO(2) - 카르도뇨에서 비첸차로


 

카르도뇨의 아마추어팀에서, 천부적인 재능은 빛을 더해갔고, 16세에 프로데뷔를 이뤄냈습니다.
그리고 2년후, 비첸차를 세리에B 승격으로 이끌었을때는, 이미 로비의 이름이 전국구가 되었고, 이탈리아전역에서 오퍼가 쇄도.
프로빈챠에서 "스타"가 탄생했던것입니다.

 

interview by Ari TAKAHASHI 
photo by Ari TAKAHASHI/Maurizio BORSARI

 

비첸차 입단은 특별한 이적도 아니었고, 특별한 계약도 없었지

 

로비, 카르도뇨에서 세리에C 비첸차로 이적했을때의 이야기를 들려줘요.

로베르토 바죠(이하 R) - 그 시점(13세 당시)에서 카르도뇨와의 게야은 아직 1년 남아있었죠. 카르도뇨에서의 플레이도 순조로웠고, 비첸차의 셀렉션을 받아들인듯해요. 그리고 테스트에 합격해서, 비첸차가 저를 영입하는것이 확정되었습니다. 그렇기때문에, 비첸차 입단은 특별한 이적도 아니었고, 특별한 계약도 없었죠. 단지, 단순히 테스트가 있어서, 그것을 받았다라는것뿐이에요.

하지만, 안토니오 모로라는 스카우트가, 당신이 어떤 경기에서 6점을 넣었다는것을 보고, 비첸차에 스카우트했다라는 전설이 남아있습니다만....?

R - 언제였던가, 여러가지 이야기가 나왔어요. 확실히, 제가 6점을 넣었던 게임은 있었어요. 총 7점가운데 6점을 제가 넣었습니다. 하지만, 비첸차로 가는 창구를 열어준 사람은 다른 사람이에요. 안토니오 모로라고하는 사람도 저에 대해 비첸차의 프런트에 좋은 레포트를 넣어줬다고는 생각하지만. 제가 비첸차에 입단하는 가장 큰 계기가 되었던 것은, 비첸차의 팀탁터 아래에서 일했던 사람(간호사)이 카르도뇨에 살고있었어요. 그가 평소 비첸차의 관계자에게 저에 대한것을 말해줬었죠. 뭐, 결국, 여러사람 덕분에 비첸차로 가는길이 열렸다는거죠.

비첸차로 이적했을때의 이적료는 어느정도였나요?


R - 저는 이적료의 액수를 알지못합니다. 아마, 매우....매우 쌌었을거라고 생각해요. 어쨌든, 20년전의 일이니까요. 그때는 유소년의 이적에 큰돈을 지불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세리에C라고 하면, 프로 팀과 계약했다는점에서, 가족은 크게 기뻐하지않았나요? 

R - 아니, 그렇지않았아요. 왜냐하면, 게임에는 나오지못했으니까. 비첸차와 계약했던것은 13세하고도 3개월때였습니다. 그때는 14세가 되지않으면 경기에 출장하지못한다는 규정이 있었어요. 그렇기때문에, 7,8개월간은 연습에 참가했을뿐, 경기에는 전혀 출장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14세 생일을 맞이해서, 겨우 경기에 출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축구를 향한 열정이 당신에게서 학업을 빼앗아가버린것에 대해, 양친은 어떻게 생각했나요? 

R 제가 서적에 흥미를 갖지않는다는것은 이미 알고있었죠. 개럿, 의무교육이 끝나면, 이후는 본인의 책임이니까 좋을대로 해라, 라고 생각했을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세리에C라고해도, 제가 프로팀에 입단한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듯해요. 뭐, 그렇다고해도, 쭉 진학을 권유했었지만. 그때마다 저는, 「공부할 시간은 없어요」라고 말하며 잘랐죠(웃음). 


 어느날, 용기를 내서, 그녀에게 말을 걸었어요.
2사람의 관계는 그 이후로 쭉 지속되었죠 

당신의 소학교라던가 중학교시절의 친구들은 당신을 어떻게봤나요? 
당신에게 뭔가 말했나요? 

R - 아직, 장래를 진지하게 생각하지않는 나이에요. 무엇보다, 저는 축구를 통해 자기자신을 만들어가려고 생각했지만, 그런것을 친구들이 이해해줄리가 없었죠. 그렇기때문에, 친구들에게도 제 장래에 대해 말한적은 없었어요. 잘못하면, 기고만장하다던가, 튀고싶어한고 생각해버릴 가능성도 있어서.

하지만, 모두 당신의 경기를 보러왔었죠?


R - 응, 왔어요. 죠바니리시대의 팀메이트가 그외에도 많이 비첸차에서 플레이하고있었기때문이에요. 모두 재능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두 무릎을 다쳐버렸어요. 그때의 의료기술은 지금정도의 레벨이 아니었기때문이죠. 한번 무릎을 다치면, 축구인생은 끝나버립니다. 혹시나, 저도 그렇게 되었을지도 모르죠.....

 
중학교는 남녀공학이었나요? 

R - 공학이에요.

아무리 축구에 몰두했다고해도, 그 연령대의 특징, 즉, 여성에게 흥미를 가졌던적은 있었겠죠?

R - 남자와 여자가 같은 클래스라는것도 있어서, 당연히 첫사랑이 생겨났었죠(웃음). 저도 실은 중학교를 졸업한 직후에 지금의 부인(안드레이나)와 교제했어요. 그녀는 다른 클래스였기때문에, 대화했던적이 없지만, 매우 가까운곳에 살았습니다. 제 집에서 100미터정도였나. 어느날, 용기를 내서 그녀에게 말을 걸었어요. 2사람의 사이는 그 이후 쭉 지속되었죠. 우리들이 교제한지, 벌써 19년이나 지났네요.
 
당신만큼 축구를 잘하면, 다른 여자아이들에게도 인기가 있었겠죠?

R - 아니, 전혀 인기가 없었어요. 축구를 하고있는 남자는 많았기때문에, 제가 특별하다고 할만한것은 없었죠.

당신이 볼에 너무 정신을 빼앗겨서, 여자아이들의 마음을 알아채지못한거 아닌가요?

R - 그러려나....아니, 다른 사람과 특별히 차이가 난다고는 생각하지않으니까(웃음).

 

축구는 내 정열이에요. 정열을 쏟고있는것으로 돈을 받다니, 정말 이상했습니다 

비첸차(톱팀)에서의 데뷔전은? 

R - 홈에서 벌어진 베로나전. 프리시즌매치였습니다. 그 뒤, 역시, 프리시즌 제노아전에서 플레이했던가...단순히 컨디션을 만들기위한 게임이었지만.

공식전의 데뷔는? 

R - 83년...아니, 82년이었나. 나이는 잘 기억나지않지만, 리그 최종라운드 경기였습니다.

자료에는 83년 6월 5일로 되어있네요. 

R - 명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확실히 브레시아전이 아니었으려나.

비첸차에서의 데뷔전의 상대가 브레시아라면...운명이라도고 말해야할까요?

 

R - 확실히 그렇네요.


카르도뇨에서 플레이했을때와, 비첸차에서의 플레이는 큰 차이가 있었나요?

R - 이름이 알려진 팀에서 플레이한다는것이 가장 큰 차이였죠. 아직 아이였던 제가, 상당히 높은 레벨의 팀에서 플레이했기때문에, 당연히, 어느정도의 긴장감은 느꼈어요. 하지만, 큰 팀에서 플레이할수있다는것은 큰 기쁨이기도했고, 자랑이기도 했었습니다. 

이전에는 느끼지못했던 압박을 느끼게된다는거죠. 단순히 "즐기는"정도의 축구라고는 할수없게되었습니다..... 

R - 아니, 상당히 즐겼어요. 경기날이 너무 기다려질정도였기때문에. 경기에서 제 힘을 발휘할수있기를 기대했었고, 게다가, 관객을 즐겁게하는것에 기쁨을 느꼈어요.

관객은 많았나요?

R - 그때, 비첸차의 죠바닐리(13~14세 카테고리)의 경기는 언제나 만원이었습니다. 믿을수없는 이야기겠지만, 14세 전후의 아이들의 경기에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어요. 우리들의 팀은 그만큼 인기있었습니다. 현재 비첸차의 스타디움 뒤에 작은 스타디움이 있었고, 그곳에서 플레이했지만, 스탠드도, 그 주위에도 사람들로 넘쳤죠.

그렇다는것은, 톱팀에 올라가서 봤던 관객의 수와 큰 차이는 없었다는건가요?

R - 아니, 오히려 반대에요. 톱팀의 성적은 나빴기때문에, 관객은 적었습니다. 유스팀의 경기쪽이 관객이 많을정도였죠.
 
최초의 급료를 기억하고 있나요? 

R - 처음으로 급료를 받았던것은 84-85시즌이었습니다. 월급 30만리라였어요.

대단하네요! 첫 월급을 받았을때, 어떤 기분이었나요? 

R - 이상한 기분이었죠. 왜냐하면, 좋아하는일을 한 결과, 돈을 받았기때문에. 축구는 제 정열이에요. 정열을 쏟고있는데 돈을 받는다, 정말 이상했어요. 급료는 제가 축구를 하기위한 필요경비로서 생각했죠. 언제나 연습장까지 스쿠터로 다녔기때문에, 가솔린요금이 상당히 들었어요(이탈리아에서는 14세부터 스쿠터 면허를 취득할 수 있다). 무엇보다, 제게는 가솔린요금 이외에 돈이 필요없었습니다. 축구밖에 생각하지않았기때문에, 따로 갖고싶은것도 없었죠.

매일, 스쿠터로 연습장에 나갔었죠. 

R - 그래요. 매일 스쿠터였죠. 특히 겨울에는 힘들었어요. 연습장에 도착했을때는 몸이 차가워져버리기때문에, 때로는 팀메이트 토토 론드의 차에 탔었죠.


프로축구선수가 되서, 세리에A에서 플레이하는것은 어렸을때부터의 꿈이었습니다. 

자료에 의하면, 83-84시즌에 톱팀에서 6경기에 출장해서, 1골을 기록했습니다. 세리에C에서 넣었던 첫골을 기억하고 있나요?

R - 그것도 브레시아전이었을거라고 생각해요. PK로 넣은 골이였죠. 그 전 시즌은 연령문제로 프리마베라에서도 톱팀에서도 플레이하지못했죠.(주 : 당시의 이탈리아축구계는 16세미만이 톱팀에서 플레이하는것을 금지했습니다. 현재는 규정이 많이 완화되었습니다). 그래서, 8월부터 2월까지는 전혀 경기에 나가지못했죠. 플레이하려면, 83년 2월 18일 생일을 기다리지않으면 안되었어요. 무엇보다, 16세가 된 직후에 부상을 당해버려서, 결국 데뷔전은 6월의 최종라운드가 되어버렸죠.

왼발의 반월판 손상이었죠? 

R - 그래요. 40일정도, 낭비해버렸죠. 

84-85시즌은, 수치를 보는한, 당신에게 있어서 최고의 시즌이 된듯하네요. 29경기에 출장해서 12골을 기록. 당신의 대활약 덕분에 비첸차는 세리에B로 승격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거물이 되었다」라던가 「성공의 길이 열렸다」라고 생각하지않았는지? 

R - 아니, 그런건 생각한적없어요. 단지, 큰 정열, 축구를 할수있다는 기쁨, 축구에 대한 사랑만으로 살았다는 느낌이려나. 매우 차분한 인생을 걸었죠. 머리에 그리고있었던 목표는 단 하나. 「좀 더 잘하고싶다」, 그것뿐이었죠. 그외에는 아무런 목적도 없었어요. 그래서 팀이 승리하면 만족했었죠.

그리고나서, 85년이 되자 세리에A의 팀이 로비의 영입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래서, 시즌도중에, 피오렌티나로 이적하는것이 결정되었죠? 

R - 신문에는 다양한 예측기사가 게재되었죠. 저는 어떤 팀으로 가게될지 전혀 알지못했습니다. 저는 교섭에서는 완전히 배제되어있었기때문이죠. 단순히 생각했던것은, 이런 소문은 선수를 혼란하게할뿐이라는것. 결코 선수를 위한것이 아니에요. 언제나 평정심으로 플레이하고, 스스로 최선을 다하는것이 선수의 본분이어야해요. 하지만, 신문과 TV의 뉴스를 보거나 듣거나하면, 아무래도 집중이 끊겨버려요. 그것은 선수에게 있어서는 매우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다행이도 평정심을 유지하며, 플레이에 집중할수있었지만.

85년 5월 3일, 당신은 피오렌티나와의 게약서에 사인했습니다. 피오렌티나행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것은?

R - 당시는 클럽측이 모두 결정했었죠. 

선수에게는 계약에 간해서 아무런 권한도 없었나요? 

R - 아무것도 없었어요. 피오렌티나와 좋은 조건으로 대화가 오갔기때문에 피오렌티나에 저를 양도했다, 단지 그것뿐이에요. 게다가, 저로서도, 세리에A의 팀이라면 어디든 좋았고. 당시는 세리에A의 팀에 들어가는것 자체가, 꿈같은 이야기였기때문이죠. 항상 「좀 더 잘하고싶다」라고 생각했기때문에 전진하려했던것같아요.
 
세리에A 클럽에 들어간다는것은 큰 전진이죠. 

R - 물론. 지금은 15세 또는 16세의 젊은이가 톱팀으로 승격되는일이 당연하게 실시되고있지만, 당시는, 18세이하의 젊은선수가 톱팀에서 플레이하는것은 거의 없었죠. 게다가, 그것이 빅클럽이라면, 한층더, 꿈과같은 이야기였어요.

가족에게서 멀리 떨어져, 모르는 도시에서 생활한다라는 불안은 없었나요?

R - (축구로 살아가기위해서는) 여러가지를 경험하지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어요. 모르는 도시로 "뛰어들어가서" 생활할 용기를 가져야한다고도 생각했었죠. 리스크없이 성공할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클럽측에게 피오렌티나행을 통보받았을때, 「네, 가겠습니다. 해보죠」라고 답할수있었어요. 단순히 바라만보는것보다, 리스크를 두려워하지않고 시도하는편이 중요했기때문에.

당신의 가족은 당신의 결단을 어떻게 받아들였나요? 

R - 가족에게 있어서는 괴로운 일이었을거에요. 보통 가정에서도, 병역으로 집을 떠나는일은 있지만, 그것은 단기간이니까요. 하지만, 제 경우는 "꿈의 실현"이었죠. 프로축구선수가 되서, 세리에A에서 플레이하는것은 어린시절부터의 꿈이였어요. 그래서, 확실히, 그 꿈이 실현되려하고있었기때문에, 그것을 멈추는것은 무리였어요.

(제 3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