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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축구(Calcio Italiano)/피오렌티나(Fiorentina)

IL VIAGGIO DI ROBERTO BAGGIO(1) - 카르도뇨에서의 소년시절


 

제 1회 ~ 카르도뇨에서의 소년시절 ~

 

로베르토 바죠 - 인구 3300명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소년이, 칼치오 최대의 스타가 된다니, 과연 누가 상상이라도 했을까요.
바죠의 인생은 언제나 "예상치못했던 일"의 연속이었습니다.

영광, 좌절, 실의, 그리고 부활. 다양한 인생의 갈림길에서, 바죠는 얼마나 생각하고, 고민해온것일까.

지금 여기서, 본인이 직접 그 진실을 밝혔습니다.

interview by Ari TAKAHASHI 
photo by Shin-ichiro KANEKO/Ari TAKAHASHI/Maurizio BORSARI

 

누나의 성체배령식(예수와 영적일치를 목적으로한 의식)에서의 로베르토 바죠. 왼쪽부터 아버지 피오린드, 어머니 마틸데, 그리고, 숙모에게 안겨있던 2세의 로비

그러면, 우선 어렸을때의 이야기부터 시작해보죠. 어디에서 태어났나요? 

로베르토 바죠(이하 R) - 카르도뇨라고하는 비첸차현의 작은 마을이에요. 저는 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이상한가요? 병원에는 가고싶지않았어요(웃음). 어머니의 이름은 마틸데, 아버지의 이름은 피오린드. 저는 8형제중 6번째로 태어났습니다.

8형제가운데, 남자는 몇명? 

R - 우리 부모님은 굉장한 사람들이에요. 왜냐구요? 왜냐하면, 처음에 여자아이를 낳고, 이어 남자아이를 낳았고, 그 다음은 여자아이, 그 다음은 남자라고하는 상태로 순서대로 낳았어요. 맨처음의 2명과 마지막 2명은 병원에서 출산, 중간의 4명은 집에서 출산했습니다. 저는 집에서 태어난 마지막 아이.

어떤 아이였나요? 

R - 저는 거의 기억하고있지않지만, 형과 누나의 이야기에 의하면 매우 "장난꾸러기"인듯해요. 가만히 있었던적이 없었던것같아요. 항상 뭔가 하지않으면 좀이 쑤셨던것같습니다. 여러가지 "장난"도 했던것같아요. 그게, 제 특기였어요.

예를들면, 어떤 장난? 

R - 정말 여러가지 장난을 쳤던것같아요. 예를들면, 8세때는, 갓 태어난 동생을 테이블 위에서 떨어뜨렸던것같아요. 동생이 강한 아이인지 어떤지를 체크해보고싶었던것같습니다. 저는 전혀 기억하지못하지만.

볼과의 만남은? 

R - 상당히 빨랐다고 생각해요. 형 왈테르와 죠르쥬가 언제나 축구를 했었습니다 저는 언제, 어디에서나, 2명과 함께했기때문이죠. 그 2명에게는 대단한 (축구를) 배웠습니다. 형 2명에게서 많은것을 배웠습니다. 무엇보다, 제 (축구를 향한) 정열이 생겨났던것이지만. 여하튼, 언제라도 축구를 하러갔기때문에.

 

당신의 형에게서, 당신이 몇살때부터 볼을 차기 시작했는지 들었던적은 없나요?
 

유모차 위에서 떠드는 아기 로비. 누나와 함께

R - 3세때라고 말했어요. 자기들만 축구를 하러 외출하면, 내가 매우 슬퍼했었다, 라고도 말했죠. 반복해서 말하지만, 나는 전혀 기억나지않지만. 그리고 몇년후의 일은 잘 기억하고있죠. 언제나 집 안의 복도에서 축구를 했었죠. 대가족이었기때문에 집도 컸습니다. 긴 마루가 있었죠. 겨울에는 바깥에서 놀지못했기때문에, 집에서 놀았어요. 숙부가 매일 저녁마다 집에 왔었고, 모두가, 테니스볼을 사용해서 게임을 했었습니다. 저와 숙부팀 vs 형 2명이죠. 정말 시끄러웠어요. 집안이 온통 부산해졌으니까. 하지만, 좋은 시기였었다, 라는 일체감이 있어요. 그라운드가 없다던가, 너무 추웠다던가, 부자유한 면은 많았지만, 매우 즐거웠어요. 그때 겨울은 지금과 비교해도 꽤 추웠었지만, 집안 어디에서나 축구를 할 수 있었기때문에 즐거웠습니다.

당신들이 집안에서 축구를 하고있는것에 대해, 당신의 부모님은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않았나요? 집안의 물건을 꽤 부쉈을것같네요.

R - 많이 부쉈죠. 집안에는 어머니가 만들었던 도기도 놓여있었고, 언제나, 물건이 날아다녀서 견딜수 없었을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아버지는 자전거(경기)를 좋아했기때문에, 우리들 아들중 누군가가 자전거 선수가 되어주기를 원했습니다. 에디 메르크스(주 : 벨기에의 유명한 로드레이서)처럼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동생에게 에디라는 이름을 붙일정도였기때문이죠. 그럼에도, 에디도 축구슬 선택해버렸기때문에, 아버지의 꿈은 실현되지않았지만.

 

당신의 부모님은 당신이 축구선수가 되는것에 반대하지않았나요? 아버지가 그만큼 자전거를 좋아했으니까.

R - 그는 누군가 1명에게 자전거 선수가 되어줬으면했지만, 즉시, 무리라는것을 깨달은듯해요. 방금 전에도 말했던것처럼, 언제 어디서든 축구를 했기때문에. 그것을 보면, 자전거레이스의 이야기를 해도 소용이없다고 생각하는것이 보통이죠. 그렇기때문에, 반대는커녕, 아버지는 오히려 격려마저 해줬습니다. 제가 축구선수가 되는걸 방해한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축구에 대한 열정에 반대해도 의미가 없다는것을, 알아줬다고 생각해요.

학교의 성적은 어땠나요?
 

R - 각 지역에서 리그전이 있었습니다. 그 리그전에 출장하기 시작하기까지는 학교의 성적도 좋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리그전에 출장하게되고나서부터는 축구에만 열중하게되어버렸고, 학교쪽은 소홀해져버렸습니다.
 

여동생 나디에와 함께 만든 사슴에 올라탄 로비

 

리그전에 출전하기 시작한것은 언제부터? 

R - 중학교 1학년때. 

초등학생 시절에는?

R - 초등학생때는 좋았어요. 공부도 좋아했었고, 학교도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리그전 즉 죠바니시미(연령 카테고리 13~14세)의 대회에 나가게되면서 학교에는 거의 가지못했죠.


어째서? 축구에 시간을 빼앗겨버러서? 그렇다고해도, 축구밖에 머리속에 없었나요?

 

초등학교 1학년때의 기념사진. 중앙 위쪽, 곱슬머리의 소년이 로비입니다(6세)

R - 축구밖에 생각하지않았어요. 지금도 기억하고있지만, 연습은 주에 2회였습니다. 수업이 끝나는것이 오후 1시, 연습이 시작되는것이 3시였습니다. 보통이라면 식사에 1시간 반이 걸리지만, 연습이 있을때는 식사를 30분만에 끝내고, 1시간 반은 롤러호케의 링크에서 워밍업을 시작했어요. 업에 1시간반이나 걸렸습니다. 그리고, 3시부터 팀연습이라고하는 스케쥴이었죠. 연습이 끝나고, 아직 해가지지않았으면, 미니게임을 했죠. 공부할 시간은 전혀 없었어요.

할 마음도 없었던건가요? 

R - 그래요, 그럴 마음도 없었어요(웃음). 

하지만, 시간은 만들려고 생각하면 만들수있는것이죠. 

R - 그런가.... 하지만, 시간이 있더라도 피곤하면 공부할 마음이 들지않겠죠? 축구이외의 일은 모두 뒷전으로 미뤘던거죠.

중학교 1학년때 팀에 들어가서 플레이하기 시작했다고했지만, 그것은 어디에서? 

R - 지역(카르도뇨)의 팀이에요. 죠바니시미의 리그전에서 플레이했습니다. 그때부터, 제게는 축구 이외에는 존재하지않았어요.


당시, 누가 당신의 재능을 발견했나요? 

R - 「이 아이는 이윽고....가 된다」라고 말한 사람은 많았어요. 제 주위에서도 상당히 있었죠. 하지만, 말하는것은 간단해요. 결과로서, 그 아이가 대성하지못하더라도 아무런 비난도 하지않기때문에. 「이 아이는 이윽고.....」라고하는 말은 상투어에요.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될지 어떨지는, 그 아이가 노력하기 나름이죠.
 

성체배령식에서 성장한 8세의 로비. 현재는 불교도이기때문에, 꽤 귀중한 샷이라고 말할 수 있을것입니다.

당신의 팀의 감독은 빵가게의 주인이었죠? 

R - 그래요. 죠바니시미 팀의 감독은(카르도뇨) 마을의 빵집주인이었습니다. 멋진 사람이었어요. 연습은 매우 즐거웠습니다. 왜냐면, 볼을 사용한 연습밖에 하지않았기때문에. 볼을 다룰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느꼈어요.


그 빵집주인은 밤새 빵을 만들고, 낮에 연습장에 왔습니다. 

R - 그래요. 연습장에는 오후에 왔습니다. "정열"이 없다면 불가능하죠. 

(지금도)그와 만나고 있나요? 

R - 물론이죠. 카르도뇨에 살고있으니까요. 

아직 빵을 만들고있나요?

R - 만들고 있어요. 

아직 감독을 하고있나요? 

R - 이제 그만뒀어요. 그럴 나이니까. 다만, 축구에 대한 열정은 변하지않은듯하지만.

당신을 자랑스러워 하고있을까요?


R - 그럴거라고 생각해요. 카르도뇨같은 작은 마을에서는 모두가 저를 자랑스럽게 생각해줍니다. 가족, 일, 자기희생이라는 생활밖에 없는듯한곳이니까요. 그는 좋은 사례에요. 한밤중까지 일하고, 오후를 아이들을 위해 바쳤기때문이죠.

당신은 중학교 1학년때 리그전에서 본격적인 축구를 시작했습니다. 당신의 형과 볼을 찼을때부터, 거기까지 도달하는 과정은 어땠나요?

R - 이탈리아에서는 어디에나 각각의 연령에 맞춘 리그전이 있습니다. 죠바니시미라던가 알리에비(15~16세)라던가. 저도 그 연령에 도달한 시점에서, 곧바로 팀에 등록되었죠. 모든것이 그곳에서 시작했습니다. 동료와 같은 셔츠를 입었을때는 매우 감동했어요. 그리고, 스파이크를 받았죠. 기뻤어요. 누구나 받을수있는것이 아니었으니까요. 제게 있어서, 스파이크는 매우 중요한 물건이었습니다. 닦고, 말리고....손질은 게을리하지않았어요. 매우 즐거웠습니다. 제가 좋아하는것을 마음껏 할 수 있었기때문에. 그리고 게임의 흥분...(축구를 하기) 전날은 잠들지못할정도로 흥분했어요. 전세계의 어린이가 같은 심경이라고 생각합니다. 뭔가에 강한 흥미를 갖게되면, 실전이 가까워짐에 따라, 높아지는 흥분.....

덧붙여서, 등번호는? 

R - 이것저것 달았어요. 처음에는 9번을 달았습니다. 그후 10번이 되었고, 그리고나서 7번, 11번도 달았죠. 언제나 공격수가 다는 번호에요. 그 후, 10번을 좋아하게되서, 쭉 10번으로 플레이하고있죠.

어린시절부터 10번에 대한 애착이 있었나요?


R - 번호보다, 어쨌든 프로선수가 되고싶었습니다. 「프로선수가 될 수 있다」, 「축구를 통해 사람으로 성장할것이다」라고 언제나 스스로에게 말을 걸었어요. 어렸을때부터 쭉 그렇게 생각했었죠.

카르도뇨의 팀에서는 동생 에디도 함께 플레이했었나요?

R - 아니, 그는 아직 어렸어요. 그가 축구를 시작한것은, 제가 카르도뇨의 팀을 떠나고나서부터.


(2회에 계속..)

음 로비옹은 카테고리를 어디로 해줘야할지 참 난감하네요
1시즌이기는하지만 밀란에서도 뛰었고 피오렌티나에서도 뛰었으니..
(사실 피오렌티나로 하는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_=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