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빈챠 클럽이 마지막으로 스쿠데토를 획득했던것은 이미 25년이나 이전의 일입니다.
이후, 세리에A의 역대우승팀에는 빅클럽이 이름을 올리고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이제 프로빈챠가 리그의 정점에 서는일은 없는것일까요.
Text by Adalberto BORTOLOTTI
프로빈챠레의 스쿠데토획득은 베로나의 케이스가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베로나의 스쿠데토획득 25주년기념이벤트를 기획해야할지도 모릅니다. 1984-85시즌, 오스발도 "죠펜하우어" 바뇨리감독이 이끄는 베로나는, 독일출신의 수비수 한스 페터 브뤼겔과 덴마크 출신의 공격수 프뢰벤 엘케어같은 외국인선수들과 전술대응능력을 가진 이탈리아선수들의 활약으로 늘어선 빅클럽을 누르고 스쿠데토를 획득했습니다. 프로빈차 클럽이 세리에A에서 우승한것은 이탈리아축구의 매력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프로빈챠레(예산이 적은 지방클럽)의 스쿠데토 획득은 지금으로서는 베로나의 케이스가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될지는 알수없지만 향후 프로빈챠레가 스쿠데토를 획득한다라는 쾌거를 보는일은 거의 없을것입니다.
당시, 베로나의 "만들어진 팀"의 대약진의 배후에는, 일본기업『캐논』의 큰 경제지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큰 스폰서가 붙어있다고하더라도 바뇨리가 인솔한 "시골팀"이 스쿠데토를 손에 넣을거라는것을 예상했던 사람은 없었을것입니다.
84-85시즌 세리에A는 베로나에 이어 토리노가 2위가 되었던것도 포함해서 여느때와는 다르게 공평했고 여느때와 다르게 예상외였던 시즌이 되었습니다. 시즌 개막전, 레가 칼치오는 주심의 완전추첨제도입을 발표했습니다. 이를테면, 시합을 담당할 주심을 완전히 추천으로 결정한다라는 시도가 처음으로 실시되었던 역사적인 시즌이 되었던것입니다. 빅클럽에게 영향받는일없이 주심을 정한다는 시스템이 있었기때문에 이변이 생겨날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추측이 옳았는지 어땠는지는 명확하지않습니다. 하지만, 레가 칼치오는 다음해, 완전추첨시스템을 중지했고 부분적추첨 시스템으로 이행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프로빈챠레가 스쿠데토를 손에 넣지못했다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심판의 추첨제가 뭔가 영향을 미쳤다라고 생각해도 이상하지않을지도 모릅니다.
베로나의 스쿠데토획득이후, 유일하게 "부분적"으로 예외였다고 말할수있는것이 91년에 우승했던 삼프도리아일것입니다. 삼프도리아는 프로빈챠레에 속한 팀입니다. 하지만, 대부호인 파올로 만도바니회장은 지안루카 비알리와 로베르토 만치니라는 수퍼콤비를 필두로 수많은 스타선수의 영입을 가능하게했습니다. 그리고, 부야딘 보스코프감독의 위트와 풍자넘치는 성격은 선수를 프레셔에서 멀어지게했고 스쿠데토를 획득했던것입니다.
2000년에 스쿠데토를 손에 넣었던 라치오도 빅클럽이라고는 말할수없지만, 프로빈챠레라고 말하는데는 윤택한 자금을 손에 들고있었습니다. 지리적으로는 북이탈리아를 중심으로한 "권력지도"에서 제외되었지만, 세르지오 크라뇨티회장이 준비했던 거액의 예산과 기록적인 연봉은 빅클럽과 동등, 아니 그것 이상의 것이었기때문입니다. 확실히, 야심으로 가득찼던 자산가가 칼치오를 손에 넣으려했던 시대였었다고도 말할수있을것입니다. 칼치오로 큰 사업을, 이라고 생각했던 라치오의 크라뇨티와 파르마의 카스트로 탄치가 클럽에 큰돈을 투자했던 시대입니다. 크라뇨티는 스쿠데토를 손에 넣었기때문에 좋기는 했겠지만, 탄치는 유럽클럽대항전 타이틀을 손에 넣었음에도 세리에A의 제패의 미주를 맛보는일은 없었습니다.
프로빈챠의 화제로 돌아갑시다. 앞에서 말했던것처럼, 프로빈챠라고해도 스쿠데토를 획득할수있다라는것은 이탈리아축구의 미덕중 하나입니다. 지방클럽이 우수한 프런트와 감독의 지휘아래, 제한된 전력을 최대한으로 살려 엘리트들에게 대항하는것이 세리에A의 매력이기도할것입니다.
제2차세계대전후의 이탈리아에서는 무적을 자랑했던 "그란데 토리노"의 시대가 "수페르가의 비극"(1949년 5월 4일, 토리노 교외의 수페르가 언덕에서 일어났던 항공기추락사고. 이 사고로 비행기에 타고있었던 토리노의 선수 및 감독, 스탭 등 23명을 포함해 승객ㆍ승무원 31명이 사망했습니다)으로 막을 내림과 동시에 유벤투스와 밀란, 인테르의 "북부의 빅3"가 순서대로 리그를 제패하는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빅클럽의 시대에 처음으로 제동을 걸었던것은 56년. 엔리코 베파니회장의 지휘아래 풀비오 베르나르디니감독이 이끄는 피오렌티나가 스쿠데토를 획득했던것입니다. 그리고나서 8년후인 64년, 이번에는 볼로냐가 세리에A의 왕자로 빛났습니다(덧붙여서, 당시의 볼로냐를 이끌었던것도 베르나르디니였습니다). 볼로냐에게 있어서는 7번째 스쿠데토획득이었기때문에 프로빈챠레의 부류에 들어가는것은 약간은 실례일지도 모르겠지만 당시의 레나트 달라라회장이 인테르의 안젤로 모라티 및 밀란의 안드레아 리쫄리, 유베의 지안니 아넬리정도의 경제력이 없었던것을 생각하면 당당한 프로빈챠레였다고 말할수있을것입니다. 그리고, 69년에는 피오렌티나가 넬로 바리니회장의 젊은이를 발탁한다라는 방침이 성공을 거두며 리그제패. 그 다음해에는 칼리아리가 만리오 스코피뇨감독의 전술과 지지 리바의 골(그리고 안트레아 아리카부회장의 악마같은 지혜) 덕분에 스쿠데토를 손에 넣었습니다.
돈이 열쇠를 쥐고있는 승부의 세계에서 돈을 갖지못한자가 승리를 거두는것은 터무니없을만큼 어렵습니다. 하지만, 세리에A에서는 그것이 가능했었습니다. 74년에는 티포지들에게서 "친아버지"처럼 사랑받았던 움베르토 렌치니회장의 지휘아래 브리티쉬 스타일의 신사로 알려졌던 톰마소 마에스트렐리감독이 강력한 스트라이커 조르지오 키날리아가 교묘히 조종. 빅클럽과의 경쟁을 제압하며 라치오를 스쿠데토로 인도했습니다.
EU내 이적의 자유화와 시합의 증가가 리그의 구조를 뿌리밑에서부터 바꿨습니다.
이처럼 과거의 이탈리아에서는 프로빈챠레가 스쿠데토를 획득하는일은 보기드문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말해도 좋을것입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계약이 만료되더라도 클럽이 선수의 소유권을 계속 보유하는 제도『vincolo』(빈콜로)의 폐지가 축구계에 큰 개혁을 불러왔던것입니다. 젊은 독자는 놀랄지도모르겠지만, 선수가 이적의 자유를 얻었던것은 매우 최근의 일입니다. 클럽이 선수를 방출할 경우, 이적을 위해 선수 본인의 사인을 필요로했던것은 78년의 일(그때까지는 클럽은 선수의 의사를 확인하는일 없이 선수의 이적을 결정할수있었습니다). 선수가 영원히 소속클럽에 매이는 제도가 폐지되었던것이 81년, 모두 최근의 일인것입니다. 과거 클럽은 선수를 장기에 걸쳐 손에 쥐고있는것이 가능했기때문에 이탈리아선수협회가「이적의 자유가 없다!」라고 이의를 제기하며 선수의 권리를 주장하며 싸웠습니다.
클럽이 선수를 현역은퇴까지 계속 보유하는것이 가능한 시대였기때문에 유베의 지암피에로 보니펠티와 밀란의 지아니 리베라, 인테르의 산드로 마쫄라, 볼로냐의 쟈코모 불가렐리처럼 축구인생의 전부를 같은 유니폼에 바친다는 반디에라가 다수 탄생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반디에라는 현재 거의 존재하지않습니다. 로마의 프란체스코 토티는 거의 없는 반디에라중 한명이지만 그를 계속 보유하기위해 클럽이 거액을 부담하고있는것도 사실입니다.
과거의 제도는 확실히 선수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것이었지만, 프로빈챠레의 회장에게 있어서는 귀중한 무기였습니다. 그러한 제도덕분에 주력선수를 보유하는것이 가능했고, 그 선수를 축으로해서 나름대로의 목표를 노릴만한 팀을 만드는것이 가능했던것입니다. 그런데, 제도의 개정으로 선수들의 이적 자유화가 시작됨과 동시에 국제레벨에서는 보스만판결(95년 12월에 나왔던 판결이며 EU에 가맹한 국가의 국적을 가진 선수의 EU내에서의 이적을 자유화한것)에 의해 모든것이 달라졌던것입니다.
현재 축구계에서는 빅클럽이 거액을 투자해서 유능한 선수를 확보하고있습니다. 프로빈챠레가 장래가 촉망받는 젊은선수를 키워내더라도 그리고 아무리 장기계약을 맺으려고해도 대금을 제시하는 빅클럽에 대해「노」라고 말할수없을것입니다. 윤택한 자금을 가진 클럽이 닥치는대로 선수를 사들이고, 그 외의 클럽은 가능한한 고가로 매각할수있는 선수의 육성을 경영의 한 수단으로하고있는것은 부정할수없습니다. 이것저것하고있는사이에 프로빈챠클럽과 빅클럽과의 격차가 더욱더 커지고 프로빈챠레의 스쿠데토획득은 꿈과같은일이 되어버린것입니다. 프로빈챠레에게 있어 최대의 목표는, 유럽클럽대항전 출전권을 손에 넣은것정도. 대부분의 클럽이 현실적인 목표를 세리에A 잔류에 두고있습니다.
2번째 이유는 국제시합의 증가로 인해 선수층을 두텁게하지않으면안되는것입니다. 과거를 더듬어보면 밀란의 회장이 되었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시작했던것이지만 현재 국내와 유럽의 양쪽에서 타이틀의 획득을 목표로한다면, 평범한 선수층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해도 좋습니다. 양쪽에서 계속 승리하기위해서는 각 포지션에 같은 레벨의 선수를 다수 보유하지않으면안되는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빅클럽은 많은 선수를 필요로하게되며 대상은 프로빈챠의 주력에까지 미칩니다. 그 결과, 그때까지는 프로빈챠에서 대활약했던 선수가 빅클럽으로 이적하고 거기서 자리를 잡지못하면 벤치나 스탠드생활을 강요받게된다, 라는 케이스가 발생해버린것입니다. 또, 조금이라도 전망이 보이는 젊은선수는 외국 클럽으로 팔려버립니다. 리보르노는 세리에A 잔류경쟁을 하고있음에도불구하고, 알레산드로 디아만티를 잉글랜드의 웨스트햄으로, 안토니오 칸드레바를 유베로, 중요한 주력을 방출하지않을수없었던것입니다.
세리에A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치열하며 가장 예측하기 어려운 리그입니다.
마지막으로, 커리어업의 가능성을 국내외에서 찾아낸것으로인해 프로빈챠레의 벤치에서 참을성이 강하게 팀을 육성하려고하는 감독이 적어진점도 요인의 하나로 꼽을수있습니다. 지금은 파비오 카펠로(잉글랜드대표감독)과 카를로 안첼로티(첼시), 로베르토 만치니(맨체스터 시티), 지오바니 트라파토니(아일랜드대표감독), 루치아노 스팔레티(제니트)같은 이탈리아인 감독들이 외국클럽, 혹은 외국의 대표감독으로서 고용되고있습니다. 현재, 프로빈챠를 인솔하는 명장은 피오렌티나의 체사레 프란델리정도. 과거 이탈리아에서는 베르나르디니, 만리오 스코피뇨, 마에스트렐리, 브루노 페자올라같은 유능한 감독이 프로빈챠에서 시간을 들여 좋은 팀을 만들어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과거의 이야기. 현대에서는 프로빈챠에 젊고 유능한 감독이 출현하면 즉시 빅클럽과 외국 클럽에서 고액연봉으로 빼내가버립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향후, 과거 베로나가 이뤄냈던 "프로빈챠의 기적"을 기대하는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빅클럽과 프로빈챠레의 힘의 차가 있는것은 방금 시작된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전에는 개인의 창조력과 자력으로 그 갭을 메웠고, 멋진 결과를 얻을 가능성이 지금보다도 남아있었던것입니다. 25년전의 베로나가 이뤄냈던 극적인 우승 직후, 칼치오의 풍향은 달라졌습니다. 스쿠데토를 가슴에 새기고 챔피언스컵을 노렸던 베로나는 2회전에서 유베와 대전(당시의 챔피언스컵은 전년도의 리그 우승팀만이 출전했었습니다. 유베는 전년도의 챔피언스컵 챔피언으로서 출전했었습니다). 베로나는 유베를 상대로 대등하게 싸웠지만, 프랑스 주심이 어이없는 판정미스를 반복하며 챔피언스컵에서 탈락했습니다. 시합이 끝남과 동시에, 엘케어가 주심에게 달려들정도로 판정미스가 많았습니다. 그후, 라커룸으로 향하는 복도에서 싸움이 발생. 경찰이 출동하는 소동으로까지 발전했지만, 이때 베로나의 라커룸을 조사하러왔던 경찰에 대해 바뇨리감독은「무슨일이죠? 도둑을 찾고있다면, 반대쪽 라커룸으로 가는게 좋을걸!」이라고 고함을 쳤다고합니다. 이렇게해서 베로나의 꿈은 막을 내리게되었습니다.
세리에A는 현재, 평형으로 달리는 2개의 선로같이 되어버렸습니다. 메인 노선에서는 몇안되는 빅클럽이 타이틀경쟁을 우아하게 펼치고있고, 또하나의 노선에서는 그 외의 팀이 상위를 목표로하며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있습니다. 과거 이탈리아축구의 매력중 하나는 수많은 이변이 일어났던것이었습니다. 세리에A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치열하며 가장 예측하기 어려운 리그입니다. 이번시즌 세리에A의 팀이 유럽클럽대항전에서 보람없는 싸움을 한 직후이고 UEFA 리그랭킹에서 독일에게 추월당할지도모른다는것은 몇년전까지는 생각할수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이전의 세리에A에서는 활기있는 프로빈챠레가 가끔 스쿠데토를 손에 넣었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재는 빅클럽이 상위를 점하고있습니다. 또한번, 프로빈챠레가 스쿠데토를 획득하는 모습을 보고싶습니다. 그날은 언제 오는것일까요.
1898~1900 : 제노아
1902~1904 : 제노아
1908~1909 : 프로 베르첼리
1910/11~12/13 : 프로 베르첼리
1913/14 : 카사레
1914/15 : 제노아
1920/21~21/22 : 프로 베르첼리
1921/22 : 노베세
* 1921/22시즌에는 새로운 리그가 깜짝 창설되었고 스쿠데토는 둘다 인정
1922/23~23/24 : 제노아
1924/25 : 볼로냐
1927/28 : 토리노
1928/29 : 볼로냐
1935/36~36/37 : 볼로냐
1938/39 : 볼로냐
1940/41 : 볼로냐
1942/43 : 토리노
1945/46~1948/49 : 토리노
1955/56 : 피오렌티나
1963/64 : 볼로냐
1968/69 : 피오렌티나
1969/70 : 칼리아리
1973/74 : 라치오
1975/76 : 토리노
1984/85 : 베로나
1986/87 : 나폴리
1989/90 : 나폴리
1990/91 : 삼프도리아
1999/00 : 라치오
※ 빠진 목록은 북부의 빅3로 인식되는 밀란, 인테르, 유베가 대부분 먹었기때문에 뺐습니다.
'이탈리아 축구(Calcio Italiano) > 세리에A'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추락하는 세리에A - 이대로 "나태"한 채로는 있을수없다! (0) | 2010.08.30 |
---|---|
칼치오경영학 - 이탈리아축구 재정위기의 실정 (0) | 2010.07.27 |
로베르토 바죠 - 드라마틱한 커리어 (0) | 2010.07.27 |
판타지스타들에게 사랑받았던 등번호 10 (0) | 2010.07.27 |
잊을 수 없는 스쿠데토 - Giuseppe GALDERISI (0) | 2010.05.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