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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축구(Calcio Italiano)/세리에A

로베르토 바죠 - 드라마틱한 커리어

Tety by Rossano DONNINI

 1967년 2월 18일, 비첸차근교에서 출생.

 13세때 비첸차의 유스팀에 입단.

 1983년 6월 5일, 82083시즌 최종라운드 톱팀(세리에C1)에서의 데뷔를 이뤄냄. 84-85시즌에는 레귤로로서 활약. 12골을 넣으며 팀의 세리에B 승격에 공헌.

 85년 5월 5일, 원정 리미니전에서 오른무릎 십자인대파열이라는 큰부상을 당함. 덧붙여서, 대전상대 리미니를 인솔하고있던것은, 뒤에 인연의 관계가 되는 사키. 그후, 바죠는 프랑스의 생테티엔느에서 수술을 받았고, 재활을 시작.

 85년여름, 피오렌티나이적이 결정. 부상으로 플레이할수없는 상태로의 이적임에도불구하고, 비올라의 티포지는 그의 입단을 크게 기뻐함.

 비올라의 이학요법사 파니의 조력도 있어서, 86년 1월에 피치에 복귀. 그때, 바죠와 파니의 사이에는, 이후 오랫동안 신뢰관계가 생겨남.

 1월 29일, 코파이탈리아 우디네세전에서, 피오렌티나의 유니폼을 입고 처음으로 공식전에서 플레이. 이후, 컵대회에서는 5경기에 출장했지만, 캄피오나토에서는 출장하지못함.

프리마베라의 일원으로서, 비아레죠국제토너먼트에 참가. 미국에서 참가했던 뉴욕 오션전에서 도피에타를 기록.

86-87시즌, 베르셀리니 새감독의 판단에 의해 톱팀에서 플레이하게됨. 코파이탈리아 엠폴리전(도피에타를 기록)을 거쳐, 9월 21일 삼프도리아전에서 세리에A 데뷔를 장식. 등번호 10을 달고, 라몬 디아스와 2톱을 이뤘던 바죠는 87분동안 플레이.『Guering Sport』지의 평점은 7.0.

데뷔전 직후에 오른무릎의 통증이 재발. 대수술이 필요했고, 7개월의 장기전선이탈.

복귀이후 보름후인 5월 10일, 원정 나폴리전에 출장했던 바죠는, FK를 직접넣으며 세리에A 첫골을 기록. 덧붙여서, 이때의 등번호는 11. 10번은 비올라의 반디에라, 안토뇨니가 달고있었음.

87-88시즌, 바죠는 에릭손감독이 인솔하는 피오렌티나의 에이스로서 활약. 87년 9월 20일에는, 당시 압도적인 강력함을 자랑한 밀란수비진을 단독 드리블로 돌파하며,「비올라시절의 베스트골」으로 불리는 골을 넣음.

87년말, 이 시기에 바죠는 불교에 귀의. 이후, 열성적인 불교도가 됨.

88-89시즌, 보르고노보와 콤비를 이루며 활약. "B&B"라고 불렸던 이 2톱은 29득점을 마크.

88년 11월 16일, 로마에서 열렸던 네덜란드전에서 대표데뷔. 등번호 11을 달았던 바죠는 풀타임출장.

89년 2월 12일, 그때까지 17경기무패를 자랑하던 인테르를 격파하는 골을 넣으며 주목을 받음.

89년 4월 22일, 베로나에서 벌어진 우루과이전에서 대표 첫골을 넣음. 골은 거의 정면, 20미터의 위치에서 오른발로 찬 FK를, GK은 바라볼수밖에없었음.

89년 6월 30일 로마전(UEFA컵출전권을 건 플레이오프)에 승리하며 88-89시즌을 마친 다음날, 고향 카르도뇨에서 안드레이나와 결혼식을 올림.

1989년 11월 19일, 아스콜리전에서 첫 트리플레타를 기록.

UEFA컵에서 디나모 키예프, 오셰르, 프레멘을 차례로 격파하며 결승에 진출했음에도, 유벤투스에게 패함.

UEFA컵결승 이틀후, 유베가 바죠의 영입을 발표. 피렌체에서는 디포지가 클럽오피스앞에서 항의시위를 벌임. 분노한 팬은 폭도로 변하며, 경찰이 출동해서 진압하는단계까지 발전.

 90년월드컵 개막. 바죠는 5경기출장 2득점으로 활약. 체코슬로바키아전에서는 하프라인근처에서 드리블로 차례차례로 DF를 무너뜨리며 수퍼골을 넣음.

덧붙여서, 준결승 아르헨티나전에서 바죠를 스타팅멤버에서 제외한것때문에(대역은 비알리), 비치니대표감독은 심한 비판을 받음. 이시점에서 바죠는 이미 국민적인 스타였음.

유베에서 3번째 발롱도르를 수상한 플라티니의 등번호 10을 계승한 바죠는, 월드컵득점왕 스킬라치와의 2톱으로 활약.

90년 12월 2일, 장녀 발렌티나가 탄생. 23세에 아버지가됨.

91년 4월 7일, 유베의 일원으로서 처음으로 피오렌티나와 대전. 킥오프전까지 야유가 울려퍼지는가운데, 바죠는 에어리어안에서 쓰러지며 PK를 얻었지만, 차는것을 거부하며 교체됨. 피치를 내려가던 바죠의 발밑에 비올라의 머플러가 떨어짐. 그가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주워서 어깨에 걸친순간, 비올라의 티포지의 태도는 180도 전환. 칭찬의 박수를 보냄.

90-91시즌, 바죠는 그런대로의 플레이를 선보인한편 팀은 부진. 무관으로 마쳤을뿐만아니라, 세리에A 7위로 28년만에 유럽컵대회 티켓을 놓침.

유베의 과거의 에이스, 플라티니는 바죠의 플레이스타일을「9.5번」이라고 표현. 톱아래와 스트라이커의 중간, 이라고하는 의미.

92-93시즌, UEFA컵제패의 공헌자가된것은 주장완장을 차고있던 바죠. 생테티엔느와의 준결승에서는 홈&어웨이에서 3득점, 도르트문트와의 결승에서는 원정에서 벌어진 1차전에서 도피에타를 기록하며 타이틀획득에 공헌.

93년은 최고의 1년이됨. 1월부터 12월까지 39득점을 마크한 바죠는, 이해의 발롱도르를 수상. FIFA취우수선수도 수상. 이해, 코디노(포니테일의 의미, 바죠의 별명)은 명실히 세계최고의 선수.

미국월드컵개막직전 94년 5월 12일, 장남 마티아가 탄생.

월드컵 개막. 개막전에서 아일랜드에게 패했고, 이어서 노르웨이전에서는 GK퇴장에의해 교체되는 굴욕을 맛본 바죠는, 결승토너먼트에 들어오고나서 나이지리아전, 스페인전, 불가리아전에서 연이어 골을 넣으며 아주리를 결승으로 인도함. PK전까지 갔던 결승, 바죠가 마지막 PK를 실축하며 브라질이 우승. 하지만, 대회의 주역이 바죠였던것에 이론은 없었음.

94년여름, 리피가 유베의 감독에 취임.「후오리크라세에 의존하지않은 팀을 목표로한다」라고 공언하며, 반 바죠의 자세를 보임.

94년 11월 24일, 원정 파도바전, 골을 넣었던 직후에 오른무릎을 부상당함.

이 부상에 의해 장기이탈해있는동안, 델 피에로가 주전으로 활약, 바죠의 빈자리를 메움.

94-95시즌 종반이 되서 피치에 복귀, 최후의 최후까지 스쿠데토획득에 공헌함. 의외인점이, 이것이 그에게 있어서 첫번째 스쿠데토였다는것.

UEFA컵 준결승전에서는 2골을 넣으며 도르트문트를 격파. 하지만, 결승전이 된 파르마와의 홈&어웨이를 바죠는 결장. 유베는 패배.

 델 피에로의 폭발을 본 유베수뇌진은, 바죠의 방출을 결단. 인테르이적이 농후하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95년 7월 5일에 밀란이 그의 영입을 발표.

리피만큼은 아니었지만, 밀란의 카펠로감독도 바죠를 냉대함. 95-96시즌, 바죠는 세리에A 28경기에 출장했지만, 그중 17번이 도중교체였음.

카펠로는 유고슬라비아출신 사비세비치를 톱 아래에 배치, 바죠를 FW로 보고 웨아, 시모네와 로테이션으로 기용함. 그럼에도, 바죠와 사비세비치의 사이에는 경의와 신뢰관계가 형성. 바죠는 이미 10번을 달고있던 그를 존중해서 등번호 18을 선택.

95-96시즌, 바죠는 2번째 스쿠데토획득을 경험함. 하지만, 지난시즌과 마찬가지로, 우승의 공헌자였던것은 아님.

96년 11월 24일, 인테르와의 더비매치에서 멋진 골을 넣으며, 밀라니스타를 열광시킴.

96-97시즌, 타바레즈 신감독은 바죠를 절대적 레귤러로 판단. 그런데, 개막이후 승점을 쌓지못하며, 프런트는 감독교체를 결단. 밀란에 황금기를 가져왔던 사키가 돌아오게됨. 94년월드컵에서의 고집을 생각하면, 바죠에게 있어서는 최악의 감독인사.

97년 4월 30일, 약 2년만에 대표복귀를 이뤄낸 바죠는, 나폴리에서의 폴란드전에서 멋진 골을 넣음. 하지만, 사키와의 관계는 파경으로 치달았고, 밀란에서는 본의가 아닌 나날을 보냄.

밀란은 11위로 시즌을 마쳤고, 사키는 해임. 하지만, 후임은 카펠로. 카펠로에게 전화로 전역에서 제외되었다고 통보를 받으며, 이적을 결심한 바죠의 앞에는, 국내외에서 수많은 오퍼가 날아듬.

97년여름, 밀란은 바죠의 이적에 대해 파르마와 합의했다고 발표. 하지만, 당시 파르마를 인솔하고있던 안첼로티가 이것에 반대하며 이적은 무산됨. 크레스포와 키에자의 젊은 2톱에 신뢰를 부여하며, 졸라를 잉글랜드로 방출한 안첼로티에게 있어서, 바죠는 불필요한 존재.

97년 7월 16일, 밀란의 여름캠프에 참가했지만, 2일후에 볼로냐이적이 발표됨.

7월 19일, 이적발표이후 24시간도 지나지않았는데, 볼로냐의 10번을 달게된 바죠가 친선경기에서 플레이. 그의 입단이 확정됨과동시에, 코리바노프는 그에게 등번호 10을 양도할것이라고 선언.

개막직전, 바죠는 트레이드마크였던 코디노를 자르고, 단발이됨. 새로운 시대를 개척한다는 결의의 표현.

97년 8월 31일, 97-98시즌개막전. 원정 아탈란타전, 바죠는 PK로 골을 넣었지만, 팀은 2-4로 패함.

7라운드 나폴리전에서 도피에타를 기록. 팀에게 시즌 첫승리를 선사함.

바죠가 귀중한 골을 계속해서 넣으며, 팀은 강등존에서 탈출. 그대로 중위로 순위를 올려나감. 하지만, 울리베리감독과의 관계는 날을 거듭할수록 악화됨.

8년 1월 18일 유베전에서 스타팅멤버에서 제외된 바죠는 항의를 위해 합숙장에서 떠남. 회장부터 선수까지 전원이 바죠를 지지했기때문에, 한때는 울리비에리가 사임을 발표하는(이후 철회)소동까지 일어남.

98년 4월 19일, 바죠의 활약(도피에타)에 의해, 볼로냐는 밀란에게 3-0으로 쾌승. 카펠로에게 앙갚음이 되는 활약이었던것은 말할필요도 없음. 이 시즌, 볼로냐는 밀란을 상회하는 8위로 약진.

이 시즌, 울리비에리와의 다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죠는 30경기출장 22득점이라는 수치를 남기며, 비어호프와 호나우두에 이어 득점랭킹 3위가됨. 이 활약에 의해, 프랑스월드컵대회에 참가.

월드컵에서는 부상중인 델 피에로를 대신해 주전이 되었고, 비에리와 2톱을 이룬 바죠(등번호 18)은, 칠레전과 오스트리아전에서 골을 기록. 월드컵 3개대회에서 득점한 최초의 이탈리아선수가됨.

준준결승 프랑스전, 델 피에로를 대신해 67분동안 피치에 올랐던 바죠는 아쉬운 슛을 날렸음에도 골까지 미치지는못함. 승부는 PK전으로 옮겨졌고, 바죠는 넣었지만, 디 비아죠가 실축하며 이탈리아는 탈락.

대회종료후, 바죠앞에는 인테르로부터의 오퍼가 날아옴. 95년에 확정시되면서 흘러간 인테르이적이 이번은 실현. 그에게는 등번호 10이 부여됨.

 98년 8월 12일, 챔피언스리그예비예선 스콘트 리가전에서 바죠는 인테르 데뷔. 1골 3어시스트의 활약으로 승리에 공헌.

 98-99시즌, 호나우두의 부상으로인해 바죠와의 "꿈의 2톱"은 거의 볼수없었음. 팀의 성적도 떨어짐.

 98년 11월 25일, 챔피언스리그 레알 마드리드전에서 도피에타를 기록. 혼전에서 넣었던 1점째, 페인트로 GK를 제쳤던 2점재는 모두 그의 득점능력을 최대한으로 살렸던것. 그룹리그탈락의 위기에 있었던 팀을 구해냄.

 시모네, 루체스크, 카스텔리니, 호지슨이라는 감독을 차례대로 교체한 인테르였지만, 성적은 전혀 올라가지않음. 시즌종료후, 모라티회장은 리피를 새로운 감독으로 맞아들이게된것을 발표. 말할것도없이, 바죠에게 있어서는 최악의 전개.

 예상대로, 리피는 바죠에게 거의 출장기회를 부여하지않음. 세리에A에서의 출장경기수는 겨우 18, 코파이탈리아가 바죠의 주된 전장. 양자의 관계는 수복할수없을정도였음.

 2000년 5월 23일, 챔피언스리그출전권이 걸린 플레이오프 파르마전. 바죠는 FK와 왼발로 강력한 슛을 넣으며 도피에타를 기록하며, 인테르에게 챔피언스리그티켓을 선물. 도중교체로 피치를 떠난 바죠를, 인테리스타는 아낌없는 박수로 전송.

 2000년 여름, 소속팀이 없는채, 바죠는 고향 카르도뇨에서 혼자 트레이닝을 계속함. 그의 목표는, 2002 한일월드컵출전. 그때문에, 국외에서의 오퍼를 거절하며, 세리에A에서 플레이를 계속할 의향을 발표.

 매스컴은「바죠의 우디네세이적이 발표근접」이라고 전했지만, 실제는 달랐음. 그를 신뢰하고있었던 마쪼네감독의 존재가 결정적인 수단이 되며, 바죠는 브레시아를 선택. 9월중순이되서, 바죠는 브레시아의 유니폼을 입게됨.

 01-02시즌, 바죠는 개막부터 하이페이스로 골을 양산하며, 9라운드 종료시점에서 8득점을 올리며 득점왕경쟁 톱에 위치. 하지만, 10월 28일 비첸차전에서 왼쪽무릎부상. 3개월의 이탈을 피할수없게됨.

 1월말에 한번은 복귀가 결정되어지만, 통증이 재발했기때문에 수술을 결단. 월드컵출전의 가능성이 소멸되었을뿐만아니라, 키리어의 위기라고 말해야할정도의 시련이됨. 그럼에도, 볼로냐의 병원에서「기적을 믿고있다」라고 기자단에게 말했던 바죠는, 기적적인 회복을 보여줌.

 2002년 4월 21일 피오렌티나전에서, 부상에서 77일만에 벤치에 복귀, 후반도중에 투입된 바죠는, 혼전중에 오버헤드를 포함해 도피에타를 기록.

 5월 5일 볼로냐전에서 바죠는 1골을 넣으며 승리에 공헌. 브레시아에게 세리에A 잔류를 선사.

 그럼에도, 트라파토니의 결정을 뒤집는데는 미치지못함. 발표된 한일월드컵멤버안에, 바죠의 이름은 없음.

 새로운 시즌이 개막, 월드컵의 꿈이 좌절된 충격에서 일어난 바죠는, 마쪼네의 아래에서 최선을 다할것을 결의.

 2002년 10월 27일 코모전에 스타팅멤버로 출장하며, 세리에A 400경기출전을 달성.

 12월 15일 페루자전에서 PK를 넣은 바죠. 프로통산 300번째골을, 바죠는 부친에게 바침.

 12월 18일, 레알 마드리드의 창설 100주년기념경기에 초대받았던 바죠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플레이.

 클럽의 기록이 되는 3시즌연속 세리에A 잔류를 확정지은후, 마쪼네감독이 사임. 바죠도 그와 함께 이적할것을 검토했지만, 데 비아지감독의 만류에 의해 잔류를 결심.

 7월 4일, 무릎수술.

 현역 최후의 시즌이 개막. 하지만, 데 비아지는 극단적인 수비전술을 채용. 바죠는 전선에서 고립됨.

 11월, 요통에 의해 장기간 전선이탈에 들어감.

 12월 29일, 은퇴선언.「평생 플레이를 계속할수는없다」라며 차분한 표정으로 발표.

 1월 6일 시에나전에서 복귀. 아름다운 플레이를 연발하며, 2골 1어시스트의 활약으로 팀을 승리로 인도.

 2월 4일, FIFA 100주년을 기념하며 펠레가 선택한 "100인의 위대한 선수"에 이름을 올림.

 2004년 3월 14일 파르마전, DF 3명을 드리블로 제치며 왼발슛으로 세리에A 통산 200골째가 되는 골을 넣음.

 4월 28일, 제노바에서 열린 스페인과의 친선경기에 출장. 그 경기가 아주리에서의 은퇴경기가 됨.

 5월 16일, 03-04시즌 최종라운드 밀란전에서 452경기째가 되는 세리에A 출전. 후반 38분에 선수교체의 지시가 내려짐. 8만명의 대관중이 스탠딩 오베션으로 칭찬하는가운데, 바죠는 피치에서 모습을 감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