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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축구(Calcio Italiano)/세리에A

잊을 수 없는 스쿠데토 - Giuseppe GALDERISI


앞머리에 백발이 섞이지 않았다면 쥬세페 갈데리시의 시간은 멈춰있던것처럼 보였을것입니다. 그는 지금도 젊고 아름다웠던때와 같은 체형을 하고있습니다. 그리고 또 축구에 대한 정열도 무엇하나 변하지않았습니다. 20대때와 같은 열정을, 그는 지금도 계속 유지하고있습니다.

중남미의 후오리크라세를 방불케하는 순발력과 날카로운 드리블을 갖췄던 갈데리시는 이탈리아대표에서는 모든 언더세대에서 플레이했고 1986년 멕시코월드컵대회에도 출전. 84-85시즌에는 베로나에서 11득점을 올리며 스쿠데토를 획득하는데 주역급의 연기를 펼쳤습니다. 세리에A의 긴 역사속에서도 매우 적은 "프로빈챠의 스쿠데토획득"을 경험했던 그가 영광의 추억을 말해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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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갈데리시의 별명), 베로나의 쾌거로부터 25년이 경과했어요. 지금도 믿을수없는듯한 기분인지?

갈데리시(이하) - 벌써 25년이나 지난건가……복잡한 기분이에요. 실은 확실히 오늘, 루치아노 마랑고에게서 전화가 와서 올해 6월 2일에 스쿠데토획득의 "은혼식"(25주년 기념축제)를 한다고 들었을뿐인데. 25년인가.... 정말 그렇게 오랜 세월이 경과한건가요? 저는 지금도 그때의 기쁨을 확실히 기억하고있지만말이죠.

베로나에서의 스쿠데토획득이라고 들으면 가장먼저 생각하는것은?

G - 구시가지에 있는 플라광장이 지알로블루로 물들었던일이죠. 그리고, 초만원의 스타디움, 팀메이트의 기쁜 얼굴, 베르가모의 라커룸(아탈란타전에서 스쿠데토획득이 확정), 나머지는 오스발도 바뇨리감독과의 회화일려나.

어떤것인가요?

G - 스쿠데토획득을 확정지었던 아탈란타전의 일이에요. 경기종료까지 5분이 남은 시점에서 1-1의 동점. 이대로간다면 1경기를 남겨두고 스쿠데토획득이 확정된다라는 상황이었죠. 그때, 제가 바뇨리감독에게 달려가서, 「미스터, 우리들은 "Campioni"가 되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에게 "d'Italia"라는 2개의 문자를 첨가해줬으면해서 3,4번이나 말했어요. 하지만, 그는 첨가해주지않았죠.

우승했다니, 바뇨리감독은 아직 믿지못했었나보네요.

G - 그런 타입의 남자였죠. 분별없이 들뜨지않았어요.

그 84-85시즌의 베로나의 개막 전 목표는 스쿠데토획득이었나요?

G - 농담은 그만뒀으면좋겠군요(웃음). 우리들은 현실적인 생각을 했어요. 세리에A 잔류가 목표였죠. 가능한한 빠르게 A잔류를 확정짓길 원했어요.

하지만 어떻게해서라도, 「이번시즌은 큰일을 해낼수있을듯한 기분이 든다」라고 생각했던적은 없었나요? 그렇다는것도, 그전 83-84시즌 베로나는 세리에A에서 6위라는 좋은 성적을 남겼기때문에말이죠. 당시, 베로나는 나름 강한 팀이라는 자각이 있지는 않았나요?

G - 확실히, 베로나는 나름대로 좋은 성적을 남기려고는 했었죠. 하지만 베로나는 베로나에요. 세리에A의 우승경쟁은 유베 및 인테르, 피오렌티나, 로마에 이어 그 시즌 개막 전에 디에고 마라도나를 영입하며 대폭적인 전력업에 성공한 나폴리일거라고 생각했었죠. 우리들은 스스로의 능력을 냉정히 평가했어요. 스쿠데토같은 발상은 전혀 없었죠.

그런데, 베로나는 쾌진격을 계속했었죠. 대체, 무슨일이 일어났던건가요?

G - 한가지 말할수있는것은 베로나는 팀으로서 뭉쳐있었다라는것. 우리들은 17명이서 팀을 구성했어요. 선수층은 결코 두텁지않았죠. 하지만, 팀내에는 조화의 정신이 있었죠. 함께 싸운다라는 강한 팀의식이 있었어요. 피치안팎을 불문하고 팀으로서 일체감이 있었어요. 그건 바뇨리감독이 목표했던것이기도했었죠. 다른 감독과 비교해서 약간 색다르다고해야할까....그는 롬바르디아방언(바뇨리가 태어났던 밀라노를 포함한 북부이탈리아지방)이 심했어요. 프뢰벤 엘케어라고 말하는것을 이해할수없어서, 미팅때는 감독이 말할때 내쪽을 봤어요. 그렇기때문에 계속 통역했었죠. 「감독은 『패스를 갈데리시에게 보내!』라고 말하고있어」라고(웃음). 바뇨리는 피치내의 일에 관해서는 입이 험한 감독이었지만 피치바깥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않았죠. 요컨데, 선수들을 신뢰했다라는것이죠. 어른이기때문에 자기관리정도는 할수있을거라고 생각했었을거에요.

당연히 선수들은 모두 모두 규율바른 생활을 했었겠죠.

G - 아니, 우리들은 기숙학교에서 생활하는게 아니에요(웃음). 그리고, 젊고 원기왕성한 녀석들도 몇명정도 있었기때뭉니죠. 저도 베로나에 입단했을때는 20세였었기때문에 나름대로 놀았던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중요한것은 진지한 태도로 연습에 임하는것. 경기와 마찬가지로 연습장에서의 미니게임에서도 최선을 다했어요.

비록 밤에 놀러가더라도 오전 3시에는 침대에 들어갔다는건가요?

왼쪽측면수비수 마란곤(좌측)과 갈데리시

G - 마란곤을 말하는건가요?(웃음) 그런일도 있었지만, 정말 성실한 선수였어요. 그는 자주 이렇게 말했죠. 「나는 잠버릇이 나뻐」라고. 연습장에는 언제나 정해진 시간에 왔었어요. 마란곤뿐만이 아니라 전원이 그런 꼼꼼한 면을 갖고있었죠. 그것이 강력함의 비결이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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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나의 강력함의 비결을 다른것에서 찾아본다면?

G - 좋은 축구를 했다라는것이려나. 당시의 베로나는 심플하고 효율이 좋은 축구를 했었다고 생각해요.

바뇨리감독의 철학도 한몫 한건가요?

G - 그를 빼놓고 당시의 베로나를 말하는것은 불가능해요. 저는 바뇨리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선수중 한명이었죠. 감독을 하게된 지금도 바뇨리를 자주 생각해요. 그와의 만남은 충격이었죠. 쇼크를 받았다고 말해도 좋아요. 배에 펀치를 먹은것같은 느낌이었어요.

무슨일이 있었던거죠?

G - 그건 여름캠프 첫날이었어요. 83년 여름이었죠. 저는 그때까지 유베에서 플레이했었어요. 하지만 캄피오네가 많은 유베에서는 출전기회가 제한되었죠. 그렇기때문에 베로나에게 유혹받았을때, 오퍼를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베로나의 구세주"가 될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거기까지는 구상이 미치지 못했죠. 하지만 벤치요원으로 비춰질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못했어요.

바뇨리감독이 그렇게 말했던간가요?

G - 아니, 그는 아무것도 말하지않았습니다. 다만 칠판에 썼었죠.

어떤 풍으로 썼던건가요?

G - 캠프 첫날, 칠판에 주전멤버 11명의 이름이 쓰여졌습니다. 거기에 제 이름은 없었죠. 바뇨리감독이 그 시점에서 그렸던것이 조 조단과 마우리시오 이오리오 2톱이었어요.

그것을 본 당신은 어떤 행동을 했었나요?

G - 지암피에로 보니펠티에게 전화해서, 「이곳에는 있고싶지않아」라고 전했죠. 그 시점에서 아벨리노가 저를 원했었다는것을 알았기때문이죠. 하지만, 그는 인정해주지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니펠티의 선택이 옳았다는것이죠.

당신을 높게 평가하지않았던 바뇨리감독을 어떻게 납득시킨건가요?

G - 조던이 아직 준비되지않았던것도 있어서 시즌개막전의 코파이탈리아에서 플레이할 기회를 얻었죠. 그때 좋은 플레이를 했었던것이 컸다고 생각해요. 저에 대한 평가가 확실히 높아졌기때문이죠. 그때 바뇨리감독은 이렇게 말해줬습니다. 「너는 엄청난 에너지를 갖고있군. 선발로도 교체출전으로도 뭔가를 해낼수있을만한 힘이 있어」라고.

그때 두사람 사이에 신뢰관계가 생겼던것이군요

유베에는 80년 여름에 입단. 아직 17세였던것도 있어서 트라파토니감독을 시작으로 팀메이트에게도 사랑받았습니다

G - 하지만 처음은 어려웠어요. 저는 유베에서 모두에게 응석을 부렸기때문이죠. 유베에서는 보니펠티와 지오반니 트라파토니에게 사랑받았죠. 그리고 그때 유베에 재적하고있었던 캄피오네들에게도 귀여움을받았어요. 금요일 밤에는 항상 디노 조프나 가에타노 시레아에게 저녁식사 초대를 받았기때문이죠. 그들의 부인도 함께였어요. 제가 주빈석에 앉았던적도 있었죠.

유베에서 배웠던것은 무엇인가요?

G - 많은것을 배웠어요. 선수로서 가져야할 매너 및 규칙을 지키는것, 축구를 일로서 진지하게 받아들이는것 등, 정말 많은것을 배웠죠. 젊었을때 로베르토 베테가와 프랑코 카우지오, 파올로 로시, 조프와 함께 연습했다라는것이 어떤것인지 상상할수있나요?い?

그런 위대한 선수들이에게서 어떤 기술을 배웠나요?

G - 마크를 떨쳐내는 방법부터 볼을 차는법, 그리고 상대의 수비수보다 먼저 공간을 발견하는 방법이라던가 그들에게서 배웠던것은 한두가지가 아니에요. 가장 중요한것은, 베테가와 로시의 콤비플레이를 보고 배웠죠. 파트너를 살릴수있는 플레이를 하면 거기서 신뢰관계가 생겨난다. 이것은 "황금규칙"이에요.

당신 자신은 누구와의 콤비가 가장 좋았었다고 생각하나요?

G -  베로나에서는 이오리오와의 콤비가 가장 좋았다고 생각해요. 이오리오는 키가 작고 민첩한 저와 비슷한 타입의 공격수였어요. 하지만 그 다음으로 콤비를 이뤘던 엘케어와의 2톱이 최고였을지도 모르겠네요. 어쨌든 스쿠데토를 획득했기때문이죠

엘케어와 당신 2톱의 콤비네이션은 어떻게해서 탄생하게되었나요?

G - 엘케어는 덴마크대표 선수이고, 저도 이탈리아대표였어요. 대표클래스의 선수가 콤비를 이루면 그만한 것을 해낼수있는거죠(웃음). 콤비네이션같은건 피치위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것이죠. 2명 모두 운동량이 풍부했었지만 엘케어는 강력한 피지컬, 저는 상대의 마크를 떨쳐내는 움직임으로 공간을 만들어내는 특기를 갖고있었죠. 당시 저는 공간을 열어 배후에서 미드필더가 공격에 가담할수있는 플레이도 했었고, 물론 엘케어가 슛을 날릴수있도록 공간을 만들어내는 움직임도 보여줬었죠.

피치위에서 발군의 콤비네이션을 쌓았던 엘케어와는 피치바깥에서도 사이가 좋았었나요?

G - 그 팀은 전원이 "붉은 실"로 묶여있는듯한 느낌이었어요. 엘케어와는 약간의 추억이 있어요. 하프타임의 일이죠. 매우 긴장해서 시합의 전반을 0-0으로 마치고 라커룸에 돌아왔던 우리를 바뇨리감독은 진정시켜줬습니다. 차분한 어조로 선수들에게 말을 걸었어요. 그때 라커룸에 엘케어가 없다는것을 알아챘습니다. 무슨일이 있는건가라고 생각했었죠. 그후 팀메이트는 후반이 시작했기때문에 피치로 돌아왔지만 저는 얼굴과 머리카락을 물로 적시기위해 샤워룸으로 갔었교. 그랬더니 담배냄새가 났어요. 보니 엘케어가 담배를 피우고있었죠. 그는 저를 보고 영어로 「Don’t worry.」(신경쓰지마)라고 말하며 제게도 담배를 내밀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잠시 휴식을 취한뒤 함께 피치로 돌아왔죠.

그 경기 후반, 골을 넣었다고 말하는건 아니겠죠(웃음).

G - 아니 확실히 그말대로에요. 엘케어는 골을 넣었고 우리들은 귀중한 승리를 손에 넣었습니다. 담배에 뭔가 위험한게 들어있었던것은 아니에요(웃음). 그는 그런 남자였어요. 개성적인 선수였죠. 어쨌든, 헤비스모커였던것만은 틀림없어요. 그리고 스파이크를 신지않고도 유베를 상대로 골을 넣었던 선수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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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실제로 스파이크를 신지않고 유베를 상대로 골을 넣었는지 어떤지는 알수없지만 당신이 헤딩으로 스테파노 타코니(유베의 골키퍼)를 무너뜨렸던것은 사실이죠?

G - 유베전의 일은 지금도 잘 기억하고있어요. 실은 그 순간 저는 볼을 전혀 보지못했었죠. 오른쪽측면에서 크로스가 날아왔지만 볼이 태양에 가려서 전혀 볼수없었어요. 그탓에 타코니는 수비와 교차했고 볼이 갑자기 제 눈앞에 나타났었어요. 본능적으로 머리를 내밀었고 우연히 맞고 골에 들어갔을뿐이에요.

당신은 현역시절, 유베를 상대로 골을 자주 넣었었죠.

G - 그래요. 트라파토니는 실수를 했다고 생각해요. 유베전을 앞두고, 벤치에 앉아있던 과거의 팀메이트와 대화를 했을때, 트라파토니가 제 엉덩이를 차며 이렇게 말했죠. 「나누, 우리들을 상대로 골을 넣는것은 적당히좀 해둬!」라고 말이죠(웃음).

스쿠데토를 획득했던 84-85시즌, 당신은 유베뿐만이아니라 다른 팀에게서도 많은 골을 빼앗았죠.

G -  결과적으로 42경기에서 11골을 기록하며 팀내 득점왕이 되었죠. 엘케어도 8골을 넣었어요. 그때의 베로나의 대단함은 3번의 패스로 결정적인 기회를 만들어냈던것. 겨우 3번의 패스만으로. 당시의 비디오를 보면 그때의 축구가 전술적으로 뛰어났것에 지금도 새샘 놀라게되요. 당시의 베로나에서는 최종라인의 2명은 스토퍼로서 수비에 전념했었지만 그들 이외의 전원은 프레싱과 카운터어택, 볼포제션을 의식했었죠. 스쿠데토를 획득하기전인 83-84시즌에는 이미 그런 의식이 팀 내부에 존재했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전술을 반복해서 연습할 시간이 없었죠.

하지만, 바뇨리감독의 공적은 과소평가되고있는듯한 생각입니다.

G - 그에게는 경기를 읽는 특별한 재능이 있었습니다. 예를들면 수비수 로베르토 토리첼라. 바뇨리감독은 토리첼라를 키플레이어로 봤었죠. 그를 축으로한 전술을 생각했던거죠. 그것은 옳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요.

구체적인 역할을 가르쳐줄수있나요?

G - 최후방에서 골키퍼 클라우디오 가렐라가 볼을 잡았다고합시다. 그러면 수비수 토리첼라가 가렐라에게서 패스를 받습니다. 토리첼라는 높은 테크닉을 가진 선수죠. 볼을 컨트롤하면서 즉시 미드필더 안토니오 디 젠나로에게 종으로 패스를 보냅니다. 패스를 받은 디 젠나로는 측면을 열어 거기서 중앙으로 크로스를 올립니다. 그리고 그 볼을 저나 엘케어가 골로 밀어넣는다는 패턴이었죠. 요컨데 우리들은 3번의 패스로 골을 만들어낸다고하는 심플한 축구를 했어요. 이 스타일은 매우 마음에 들었죠. 그렇기때문에 제가 감독이 되고나서도 이 전술을 자주 사용했어요. 포지아의 감독을 하던때는 이 전술을 "토리첼라"라고 불렀을정도에요(웃음).

당시의 베로나에서 시즌 후반기, 스쿠데토 획득의 원동력이 되었던것은?

G - 굳이 한명을 거론해서 말한다면 바뇨리감독일거에요. 선수는 거의 전원이 커리어에서 최초라고 말할수있을만한 플레이를 했을겁니다.

공격형 미드필더 피에트로 판나는 어땠었나요?

G - 판나는 차이를 보여줄수있는 선수였습니다. 예측할수없는 플레이를 했었죠. 유베에서는 기대이하의 플레이로 끝났었지만 베로나에서 되살아난듯합니다. 팀메이트전원이 출석했던 크리스마스디너때 언제나 조심스러웠던 그가 갑자기 마이크를 잡고서 큰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번시즌 큰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우리들이라면 가능할것입니다!」라고말이죠. 그리고 그의 말이 우리들의 마음에 불을 지폈습니다.

골키퍼 가렐라의 플레이스타일에 대해서는?

G - 아름답다고는 말할수없었지만 그가 밀리는일은 없었습니다. 어떤 선수가 상대라도 멈춰세웠죠. 그리고 그 시즌의 그는 매우 운이 좋았습니다. 볼이 포스트에 맞고 그의 앞에 돌아온다던가말이죠. 금요일 밤은 가렐라의 집에서 자주 저녁식사를 했었죠. 토요일의 연습에서는 그는 상의를 껴입고 전날밤의 칼로리를 필사적으로 연소시키려고했었죠(웃음).

중량급의 선수라고 한다면 한스 페터 브뤼겔을 빼놓을수없겠죠. 베로나가 스쿠데토를 획득했던 시즌, 그는 9골을 기록했습니다.

G - 피오렌티나전이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골을 넣은후 전속력으로 제 쪽으로 달려왔어요. 부둥켜안을거라고 생각했었죠. 시속 100킬로미터는 되는것처럼 보였어요(웃음). 하지만 그대로 부딪힌다면 저는 죽을거라고 생각했던것을 기억하고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1미터 앞에서 갑자기 멈추더니 공중회전을 했었죠. 마치 서커스같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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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느 시점에서 스쿠데토획득을 확신했었나요?

G - 그건 기억나지않아요. 하지만 캄피오나토첫경기 나폴리전을 3-1로 승리했을때 이미 스쿠데토의 화제는 나온것같은 생각이 듭니다. 물론, 농담이었지만요. 그리고 5라운드 유베전에서 2-0의 승리를 거뒀을때 스쿠데토획득을 진지하게 입에 담게되었습니다. 물론, 확신이라는 의미는 아니지만말이죠.

가장 스쿠데토가 멀어졌다고 생각했던 순간은?

G - 18라운드 우디네세전이었으려나. 프리울리 원정에서 우리들은 3-0으로 리드했었죠. 그런데 그후 3점을 빼앗기며 동점으로 추격당해버렸습니다. 3-3으로 추격당한후 시합을 재개하기전에 저는 센터서클안에서 엘케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이, 뭔가 우승을 놓친듯한 생각이 들어」라고말이죠. 그리고나서 1분도 지나지않았을때 엘케어가 골을 넣으며 다시 리드했었죠.

당신 자신이 가장 빛났던 시합과, 최악이었던 시합을 가르쳐줄수있나요?

G - 유베전에서의 골도 좋았었지만 피오렌티나전에서 도피에타를 기록했을때가 최고였으려나. 반대로 최악의 순간은 시즌종료까지 남은 5경기의 시점인 토리노전에서 PK를 실축했었을때. 제가 PK를 실패해버렸기때문에 토리노에게 패배했었죠. 하지만, 그 시즌의 베로나는 그리고나서도 달랐습니다. 라커룸의 일체감이 그렇게 만들었을거에요. 스쿠데토획득을 포기하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3주후, 우리들은 세리에A 우승을 달성했죠.

도시 전체가 스쿠데토획득을 축하했었죠.

G - 그래요, 제 인생에서 최고의 순간중 하나에요. 팀이 베로나의 거리와 일체화된 순간이기도했었죠. 팀과 티포지가 하나가 되었어요. 우리들은 베로나 거리와 함께 살아왔었죠. 바에도 자주 갔었고, 당구장에서도 자주 놀았어요. 우리들은 베로나라는 도시의 가족이었어요.

베로나의 스쿠데토획득은 확실히 쾌거라고 말해야할일이었죠.

G - 코모로 원정을 갔을때, 티포지용의 버스가 몇대나 준비되어있었죠. 가족을 데리고 팀과 함께 일요일을 보내라, 라는 느낌이었어요. 와인과 치즈를 대량으로 쌓아뒀었죠. 끝에는 선수 몇명이 그 버스에 타서 먹거나 마시거나했었죠. 뭐 저도 그 안에 있었지만요(웃음).

스쿠데토획득은 당신을 유명인으로 만들어줬습니다. TV프로그램에 출연한다거나 레코드를 낸다거나했었죠?

G - 노래를 좋아했었기때문이죠. 최초의 레코드는 『Sto Correndo』(나는 달리고있다)라고. 그후, 파도바로 이적하고나서 추가로 2장정도 냈었죠. TV에서는 아달베르토 센마(이탈리아에서 유명한 축구저널리스트). 『Guering Sportivo』지에 기고하고있습니다)와 함께 축구 뉴스프로그램의 사회를 하게되었죠. 그 프로그램에는 유명한 저널리스트가 다수 출연해줬어요. 하지만 하나만은 마음에 남아있어요. 토리첼라가 출연해줬을때, 카메라 앞에 제리 루이스(미국의 희극배우)의 흉내를 시키지못했던것. 그의 흉내는 최고였어요(웃음).


바뇨리감독은 81-82시즌에 세리에B 베로나의 감독으로 취임. 그 시즌에 팀을 세리에A로 승격시키며 주위의 예상을 뛰어넘어 4위의 좋은 성적을 남겼습니다. 83-84시즌은 6위로 마쳤지만 팀으로서는 성숙해졌습니다. 그리고 84년 여름, 덴마크 공격수 엘케어와 독일의 미드필더 브뤼겔을 영입. 베로나는 개막이후 14경기무패의 쾌진격이 계속되며 최종적으로 15승 13무 2패. 2위 토리노와의 승점차를 4로 벌리며 클럽사상 최초로 스쿠데토를 손에 넣었습니다. 우승의 원동력이 되었던것은, 팀 최대인 11골을 넣었던 갈데리시. 그리고 유베, 로마와의 중요한 일전에서 골을 넣었던 엘케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