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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축구(Calcio Italiano)/피오렌티나(Fiorentina)

투장의 루트 - Sinisa MIHAJLOVIC

미하일로비치의 세계관을 공유하는것은 결코 간단하지않다. 1969년에 태어났으면서도 그는 끔찍한 전쟁과 조국의 붕괴를 "체험"했다.
다양한 비극을 헤쳐나오는 과정에서 그는 누구보다도 강한 투쟁심을 몸에 익혔던것이다. 

Interview and text by Mario TENERANI
Translation by Minato TAKAYAMA


"저는 아직 42세밖에되지않았지만 이미 70년의 인생을 걸어온것같아요"라고 그는 말했다. 전쟁의 이야기로 흘러가면 그의 말투는 무거워졌고 열띠게된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 대부분에게있어 전쟁에 관한 이야기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 듣는것이지만 시니사 미하일로비치는 1969년에 태어났으면서 전쟁을 "체험"했다. 그것에 전율을 느끼는것은 나뿐만은 아닐것이다. 이야기는 1991년 5월 29일에 벌어졌던 챔피언스컵 결승부터 시작되었다. 오만할정도로 우아했던 마르세이유와 헝그리정신으로 날이 서있던 레드스타. 대조적인 팀의 맞대결이다. 4번째 키키를 맡았던 젊음 미하일로비치가 PK를 넣은날로부터 20년이 지났다.


유효슈팅이 0으로 끝난 결승은 전대미문이죠.

90-91시즌의 챔피언스컵에서  레드스타는 우승했지만 유고에서 내전이 시작된것은 그 직후였죠...

미하일로비치(이하 M) - 그때 레드스타는 최고의 팀이었어요. 그후에 다른 타이틀도 손에 넣었지만 그 "마법의 밤"에서 승리했을때의 감동은 없습니다. 내전이 없었다고하더라도 그 쾌거를 재현하는것은 어려웠을거에요.


경기전에 어떤 기분이었는지 기억하고있나요?

M - 모든걸 확실하게 기억하고있어요. 경기 1주일전에 현지에 입성해서 만반의 준비를 했었죠. 경기당일 팀컬러인 백과적으로 가득찬 경기장이 시야에 들어왔을때 몸이 떨릴정도의 감동과 흥분을 맛봤어요.

91시즌에 챔피언스컵을 제패했던 레드스타


만반의 준비라는것은?

M -  리스크를 피하고 지키는 축구를 철저하게하는것. 우리들은 챔피언스컵에서 가장 지루한 경기를 펼쳤죠. 유효슈팅이 0으로 끝난 결승같은건 전대미문이었어요.(웃음)


그리고 승부는 PK전으로 돌입했습니다.

M -  스토이코비치는 그 1년전까지 레드스타의 상징이었죠. 그는 감독에게 "PK는 찰수없다"라고 말했던것같아요. 한편 우리들은 모두가 PK를 차고싶어했었죠. 이 시점에서 승리를 확신했었어요.


당시 당신의 포지션은 어디였나요?

M -  4-4-2의 왼쪽측면수비수였어요. 적극적으로 오버랩을 시도하는 지금의 바르가스같은 선수였죠. 수비수였지만 왼쪽측면의 모든곳을 제가 담당했다고 생각해요. 당시부터 왼발킥에는 자신이 있었죠. 절묘한 커브를 실은 크로스를 찼었어요.


당시 레드스타가 강했던 비결은?

M -  헝그리정신이죠. 그뒤 이런저런 팀을 돌아다녀봤지만 그때의 레드스타정도로 승리에 굶주려있던 집단은 없었어요. 축구는 우리들에게 있어 해방되는 수단이었고 풍요로워지는 유일한 방법이었던거에요.


첫 팀은 로마였었죠.

M -  그때의 즐거웠던 추억을 말하자면 빌리어드려나. 지안니니가 승부를 걸어왔기때문에 낮은 금액을 걸었지만 패배했어요. 그리고 건 돈을 끌어올리면서 진심으로 승부를 걸었죠. 단단히 벌었지만 그 방식은 얼마지나지않아 산산히 부서졌어요(웃음).


티토정권하의 유고슬라비아에서 보냈던 유년기는 어땠었나요?

M -  유고슬라비아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였어요. 아버지는 트럭운전수였고 어머니는 공장에서 일했었죠. 가난하다고 느낀적은 없었어요. 주말에는 트리에스테까지 나가서 쇼핑을 했었죠.


그리고 1980년에 티토는 사망했습니다.

M -  11세때였지만 모두 울었어요. 학교는 1주일간 쉬었죠. 그의 영묘에 줄줄히 늘어서던 장사같은 행렬을 지금도 확실히 기억하고있습니다.


91년부터 92년에 걸쳐 유고슬라비아는 분열했어요. 그사이에 25만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당신이 20세일때였죠.

M -  축구적인 면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시기였지만 제 인생에 있어서는 최악의 시기죠. 제 고향 부코바흐에서 끔찍한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99년 3월, NATO는 유고슬라비아를 공폭했어요. 당신은 당시 이탈리아의 총리였던 마시모 달레마와 직접 담판을 했었죠?

M -  라치오의 회장이었던 크라뇨티에게는 감사하지않으면안되겠죠. 그가 총리와의 면담을 주선해줬어요. 저는 달레마총리에게 말했죠. "당신은 큰 실수를 범하고있습니다"라고. 그의 대답은 "유감스럽지만 우리는 NATO의 일원이고 다은 방법이 없어요"라고 답변했어요. 저는 지금도 공폭이 시작된 날의 일을 확실히 기억하고있어요.


크로아티아인인 당신의 숙부는 당신의 아버지가 세르비아인이라는것을 이유로 죽이려고했었던것같네요. 당신의 아이들이 성장했을때 이 유감스러운 사건을 어떻게 설명해줄 생각인가요?

M -  아무것도 설명하지않을거에요. 그때의 일은 저 또한 이해할수없습니다. 전쟁은 인간을 바꿔놔요. 형제가 서로 죽인다니 미쳤다고밖에 말할수없어요. 전쟁의 최악의 경우를 우리들은 봤던거죠. 특히 제 친구가 했던일을 생각하면....


당신의 친구와 무슨일이 있었던거죠?

M -  학교에 함께 다녔던 소꿉친구였지만 그는 크로아티아인 제 어머니와 같았죠. 그리고 내전이 시작되었을때 그는 제 부모에게 도시에서 나가라고 명령했습니다. 다음날 제 부모님이 그것에 따르지않았다는것을 알게되자 그는 제 사진을 향해 총을 쐈고 제 집에 방화를 저질렀어요.


그 이후에 그와 만나서 대화를 나눠본적은 있나요?

M -  저와 한번 얼굴을 마주쳤죠. 정말 놀랐어요. "그렇게하지않았다면 나는 내 부모님을 죽였어야했어"라고 변명했죠. 결국 저는 그를 용서했습니다. 그때는 뭐든지 미쳤었기때문에...


인테르는 개인플레이로 시종일관하며 자멸했던 1년이었다.

슬슬 현재의 축구계의 이야기로 들어가보죠. 밀란의 스쿠데토 획득을 어떻게 보고있나요?

M -  막스(알레그리의 애칭)은 최고의 일을 해냈어요. 3년전에는 3부의 팀을 이끌었던 남자가 세리에A를 제패했기때문에 대단한거죠. 그에게는 축하한다고 말하고싶어요.


이브라히모비치의 플레이를 어떻게 보고있나요?

M -  그다지 좋지않아요. 스쿠데토획득에 공헌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는 발롱도르를 노릴만한 선수니까요. 최근 몇년간 그의 성장은 멈췄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챔피언스리그에서 활약할수있는 선수가 되었으면해요.


인테르는 어떨까요?

M -  개인플레이로 시종일관하며 자멸했던 1년이었죠. 무리뉴는 개성적인 선수들을 멋지게 통솔했습니다. 베니테즈는 다른 형태로 오케스트라를 연주하려고했지만 잘되지않았죠.


레오나르두에 대해서는?

M -  모라티회장은 좋은 선택을 내렸다고 생각해요. 레오나르두를 연임시켜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모라티회장에게서 신뢰받고있습니다. 이번 여름에 당신에게 오퍼를 보낼지도 모르겠네요.

M -  가끔 연락을 주고받고있지만 저는 단지 그에게 감사할뿐이에요. 4년동안 인테르에서 돌봐줬고, 은퇴할때는 감독을 목표로하는 저를 위해 어시스턴트코치를 제의해줬으니까요. 그는 진짜 신사에요.


라치오의 약진에 대해서는 어떨까요. 내용도 결과도 만족할만한것이었을까요?

M -  정말 놀랐어요. 라치오는 작년여름 "강등당하지않기위한 보강"을 했을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정도의 성공을 거뒀죠. 하지만 이정도로 만족해버린다면 곤란해요. 저는 라치오의 팬들을 제 스스로 인정하고있지만 최근에는 클럽도 팬들도 야심을 잊어버린것같아요. 로마보다 위의 순위로 끝났기때문에 OK, 라는 모습이라면 곤란하죠. 제가 있었을때의 라치오에 그런 멘탈리티는 없었을거에요.


당신이 가장 영향을 받은 감독은 누구?

M -  아무도없다고 말할수도있지만 지금까지 지도를 받았던 감독 모두라고도 말할수있죠.

미하일로비치는 현역은퇴이후 맹우 만치니의 어시스턴트코치로서 감독의 커리어를 출발했다.

당신은 만치니와 정말 사이가 좋죠. 지금도 그와는 연락을 주고받나요?

M -  최근 10일정도는 대화한적이 없지만 하루에 3번정도 전화할때도 있습니다. 우리들은 형제같은관계에요. 지금은 맨체스터에서 쾌적하게 보내고있지만 만치오만큼 이탈리아축구를 사랑하는 남자는 없을거에요. 언젠가 돌아오겠죠.


절대로 포기하지않는 제 자세에 동조한 선수들에게 감사하고있습니다.

이번시즌 피오렌티나는 솔직히 말해서 "타오르지못했죠" 프런트가 당신을 높게 평가하는 한편 팬들은 당신에게 불신감을 갖고있는거같네요.

M -  알고있어요. 평론가들의 말은 신경쓰지않지만 팬들에게는 만족감을 얻고싶다고 생각해요. 저는 열의를 불어넣으며 일할생각이에요. 지지않고 노력할거에요. 팬들은 성적에 불만인듯하지만 이정도로 부상자가 속출한다면 어렵죠. 실제로 올해에 들어와서 주력이 돌아온뒤에 결과도 나오게되었어요.


이번시즌을 돌아본다면?

M - 어려운 1년이었지만 팀은 언제나 모티베이션으로 가득차있었죠. 절대로 포기하지않는다는 제 자세에 동조해준 프런트와 선수들에게는 감사하고있습니다. 실패도 있었지만 중요한것은 그것을 앞으로 살릴수있느냐 어떠냐에요. 총괄한다면 긍정적인 1년이었다고 생각해요. 팬들에게서 야유를 받는것은 제게 뭔가 원인이 있기때문이겠죠. 하지만 그렇다면 스스로 바꿀거에요. 라치오에서의 첫해처럼 전 로마의 선수라는것으로 심하게 비난받았죠. 하지만 저는 플레이로 평가를 얻어냈습니다. 이곳에서도 같은일을 해낼 생각이에요.


프란델리의 후임인것이 압박을 느꼈던적은?

M -  그런적은 없어요. 저는 제나름대로 좋은일을 하기위해 전력을 다할뿐입니다.


여름의 메르카토의 방침은 어떻게 결정되었나요? 다음시즌을 대비해 지금의 팀을 유지할것인지 혹은 개혁노선을 걷게될지....

M -  어느쪽이든 잘될거라고 생각해요. 지금의 전력이더라도 큰 성공을 거둘수있을테고 그런 한편으로 전혀 다른 새로운 팀을 만든다라는 생각에도 매력을 느끼고있어요. 기본적으로는 클럽측에게 받은 선수를 단련시키는것이 제 일이라고 생각하고있어요. 보강에 대해서는 프런트와 상담해서 결정할뿐이죠. 최종적인 판단을 내리는것은 저지만 무리한 요구를 클럽측에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제 조건은 "승리하고싶어하는 기분을 갖고있는 선수를 원한다"뿐이에요.


몬톨리보는 어떻게 보고있나요?

M -  재능은 틀림없어요. 이대로 성장한다면 위대한 캄피오네가 될겁니다. 앞으로는 수비면에서의 성장이 필요하겠지만 빅클럽에서도 충분히 해낼수있는 선수죠.
 


팬들은 당신이 바바카르에게 그다지 기회를 주지않는것을 불만스럽게 생각하는것같습니다만?

M -  좋은 선수지만 매일 트레이닝에서 꾸준함을 보여주지못한다면 경기에서는 기용할수없어요. 지금의 그는 2일간 좋으면 4일간 매우 좋지않다는 느낌이에요. 잠재성은 제가 보증합니다. 하지만 지금같은상태로는 출전기회는 이정도에요. 꾸준하게 좋은 모습을 발휘할수있게된다면 제가 출전기회를 늘려줄거에요.


현역시절, 당신은 무투의 얼굴에 침을 뱉으면서 큰 문제가 되었죠. 그런 2명이 감독과 선수라고하는 형태로 좋은 관계를 쌓을수있을까요?

M -  그때의 일은 생각하고싶지않아요. 제가 전면적으로 잘못했었죠. 저와 무투는 닮았어요. 무투만큼은 아니지만 저도 바보같은짓을 많이해왔었죠. 종잡을수없는일은 하는 녀석을 싫어하는건 아니에요. 그렇지만 딸은 성실한 남자와 결혼해줬으면하지만. 뭐 전세계가 그렇겠죠(웃음).


무투는 어떻게 다루고있나요?

M -  태도가 나쁜 선수는 용서하지않습니다. 매우 엄격하게 다루고있어요. 제가 선수였을때는 묘하게도 이상할정도로 선수의 기분을 맞추려고하는 감독이 있었죠. 저는 그런 태도를 보이면 구역질이 나왔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저는 나쁜 녀석에게는 거기에 걸맞는 취급을 하려고하고있어요(웃음).


질라르디노는 "피오렌티나는 챔피언스리그에 꾸준히 참가할수있는 팀이어야한다"라고 말했습니다.

M -  델라발레형제도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디에고와 안드레아는 톱이아니면안된다는 꼼꼼한 타입의 사람이에요. 당연히 피오렌티나도 톱을 목표로하죠.


디에고 델라 발레는 어떤사람?

M -  매우 개성이 강한 사람입니다. 0에서 현재의 지위를 쌓아올린 "거물"이죠. 저는 그와같은 사람을 매우 좋아해요.


피오렌티나가 스쿠데토경쟁에 참가할만한 날이 올거라고 생각하나요?

M -  델라발레형제가 있는한 피오렌티나에게는 무한의 가능성이 있어요. 안드레아 델라발레는 스쿠데토를 노릴만한 팀만들기를 구상하고있습니다. 나머지는 감독과 선수의 퍼포먼스가 하기나름이에요.


출처 : 월간 칼치오2002 2011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