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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축구(Calcio Italiano)/AC밀란

클로즈업 - 젠나로 가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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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투소에게는 가투소의 일이 있다.」
촌스러움만 가진 선수였다면 벌써 사라지고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투소에게는 누구에게도 지지않는 투쟁심과, 타협하지 않는 향상심이 있었다. 스타군단 밀란에 있는, 가장 사랑해야할 남자의 이야기

주목하는 선수는 결코 놓치지 않는다. 사나운 투견처럼 전의를 노출하고, 강력한 태클도 불사하지않는 플레이로 인해 붙여진 별명은 "린기오"(울음소리), 그보다 뛰어난 선수는 이 세계 가운데 무수히 존재하지만, 그보다도 우수한 중반의 수비자는 전무하다. 이탈리아대표 53회 출장 1득점. 1978년 1월 9일태생. 177cm 77kg

「린기오」(짐승의 울음소리)와 같은 닉네임(별명)이, 그 플레이스타일의 모든 것을 이야기한다.

 누구보다도 많은 거리를 달리고, 누구보다도 많은 적과 부딪히며, 누구보다도 많은 볼을 빼앗는다. 카카 및 피를로 및 셰도르프가 화려한 플레이로 사람들을 매료하고, 팀에서 승리를 가져오는 결정적인 골을 넣는 것을 할 수 있는것도, 그 남자가 배후에서 헌신적으로 돌아다니며 모든 빈자리를 보충하고, 몸을 날려 핀치를 미연에 막고 돌아오기 때문이다. 오심 일본대표감독이 말하는「물을 옮기는 선수」(여담이지만 이 비유는 원래 자동차 로드 레이스에 유래한다)의 대표이다.

 투쟁심을 노출하는것은 피치위에서의 행동으로부터, 혈기가 넘치는 운동량만이 장점으로 부각되어, 그렇다고하는 이미지로 말해지는것도 적지 않다. 확실히, 20대전반의 가투소는 그러한 플레이어였다.「다리미를 다리에 신고 있다.」라고까지 말해진 볼 스킬을 닦아, 명장 안첼로티의 아래에서 경험과 함께 전술안을 높여 온 결과, 30세를 목전에 둔 지금,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수비형MF이라고 하는 평가를 받기까지 하였다. 과거 2시즌은, 발롱도르의 후보 50인 가운데 이름을 연달아 올리고 있다.

 가투소의 커리어는, 걸출한 재능으로 은혜받은 사람만이 위대한 플레이어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 야심과 노력과 자기희생에 의해 얼마나 높은 곳에 이를 수 있을까를 가르쳐준다.

 젠나로ㆍ이반ㆍ가투소는, 1978년 1월 9일, 남이탈리아ㆍ칼라브리아주의 마리나ㆍ디ㆍ스키아보네아에서 태어났다.「장화의 모양을 한」이라고 하는 이탈리아반도의 꼭 땅을 밟는듯한 부분의, 이오니아해에 접한 인구수천명의 작은, 결코 풍부하다고 할 수 없는 항구도시이다.

 12세까지는 해안 및 광장에서 아마추어축구만으로 보냈고, 13세가 되어 처음으로 지역의 축구클럽에 들어간 리노는, 머지않아 페루자의 스카우트의 눈에 발견되었다. 육성부문이 충실한 프로클럽이 전무했던 칼라브리아에서는, 프로축구선수를 목표로 하려고 하면, 중부 및 북부의 클럽에 스카우트되는것 이외의, 기회가 없었다. 이렇게해서 리노는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14세에 부모의 슬하를 떠나 페루자로 향하게 된다. 평소의 놀이터였던 마을 광장에서, 동료들에게 헤어지는 말을 했을 때, 이렇게 굳게 마음에 맹세했다.「이렇게 모두와 보내는 고향을 뒤로 한 이상, 패배자로서 염치없이 돌아오는 것만은 할 수 없어요. 절대로, 돌을 갉아 먹는 한이 있더라도 성공하겠어요」

 페루자에서는 17세에 톱팀에 올라가 세리에B에서 데뷔하고(95-96시즌), 그 다음시즌에서는 18세에 세리에A 무대에 섰다. 고향을 떠난이후 4년여, 가투소는 10대의 젊은이 가운데 최고로 장래유망한 MF의 1인으로써, 이탈리아 중앙의 관계자로부터 주목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플레이에 주목하고 있던 것은, 이탈리아의 클럽만이 아니었다. 95년 보스만판결으로 EU권내의 외국인범위가 철폐된 것을 계기로, 10대의 재능을「아직 이삭이 익지않은 파릇한 논의 구매(완숙해지기 전의 전도유망한 선수들을 구매하는 것을 말하는 듯)」하기위해 유럽각국으로 스카우팅의 끈을 확장하고 있었던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ㆍ레인저스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인 조건으로 좋은 기회를 제시했던 것이다. 부친이 일생을 걸쳐도 벌 수 없을 만큼의 액수를 4년 계약으로 제시하자 가투소는, 말도 통하지 않는 영국으로 건너가서, 프로로서의 본격적인 커리어를 시작할 것을 결의한다. 97/98시즌의 일이다.

 스코틀랜드에서의 경험은, 19세부터 20세에 걸친 단 1년에 지나지 않았지만, 가투소라고하는 선수의 커리어에 있어, 그리고 인생에 있어, 결정적인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 되었다.

 투쟁심을 노출하는 플레이스타일은, 전력을 짜내 끝까지 싸우는 것을 무엇보다도 높게 평가하는 스코틀랜드의 축구에 딱 맞았다. 빠른 속도로 주전으로 발탁된 가투소는, 테크닉 및 센스보다도 강력함 및 헌신을 소중히 하는 서포터에게도「라이노」(스코틀랜드인은 리노와 같은 발음을 할 수 없다)라고 불리며 사랑받았다.

 스코틀랜드에서의 커리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빠르게 막을 내리게 된것은, 이적 2년째의 98/99시즌에 취임한 네덜란드인 감독 딕ㆍ아드보카트와 뜻이 맞지 않았던 것이 두드러졌기 때문이었다. 아드보카트는 가투소의 운동량을 살리려고, 중반이 아닌 오른쪽 사이드백으로 포지션을 전환하려고 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리노는 사이드백으로 전향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몇 번이나 플레이해도, 자질적으로도 기술적으로도 자신에게 적합한 포지션이 아닌 것을 몸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대리인을 통해, 세리에A 하위의 살레르니타냐로부터 이적의 이야기가 날아들었다. 리노에게 있어 마침 운이 좋았던 것이다. 레인저스의 회장이「희망하는 금액으로 10년계약을 맺어도 괜찮다」라고까지 말하며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에 돌아가는 것을 결심했다. 같은 시기에 유벤투스로부터도 앞으로 1년은 스코틀랜드에 남고 다음시즌부터 이적하는, 그러한 조건으로 오퍼가 있었지만, 곧바로 이탈리아에서 플레이하고싶었던 가투소는, 그것마저도 거절했다.

 살레르니타냐는, 델리오ㆍ로시감독(현 라치오)의 아래, 디ㆍ바이오(현 제노아), 디ㆍ미켈레(현 토리노), 바누키(현 엠폴리)와 같은 당시 20세 안팎의 유망한 젊은이를 가지런히 한 좋은 팀이었지만, 최후까지 달라붙었음에도 최종전에서 세리에B 강등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가투소의 아래에는, 로마, 유벤투스, 그리고 밀란과 같은 빅클럽으로부터의 오퍼가 날아들고 있었다. 클럽에서는 로마와의 교섭을 진행하고 있었지만, 가투소가 어렸을때부터 동경했던 밀란행을 강력하게 주장하며, 이적이 결정되었다.

 99/00시즌, 21세에 이적했던 밀란에서는, 포지션다툼이라는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매주시합에 출장해 플레이하는 것이 당연했던 이전과는 달리 혈기왕성한 젊은이에게 있어, 벤치에서 시합을 바라보는 나날을 참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던와중에, 피오렌티나로의 렌탈이적(임대이적)의 이야기가 날아들었고, 가투소는 클럽오피스에 몇 번이나 밀어닥쳐, 피렌체에 가게해줬으면 좋겠다고 담판지으려했다. 그러나 밀란은 결코 그를 손에서 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당시의 감독 알베르토ㆍ자케로니는, 시즌중반부터 가투소를 중반오른쪽사이드에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3-4-1-2시스템의 오른쪽사이드와 같은 포지션은, 혼자서 피치의 것을 모두 커버해야한다. 레인저스에서 거부했던 오른쪽사이드백 이상으로 가혹한 포지션이다. 그러나 리노는,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았다. 사이드하프로써 레귤러(주전)의 자리를 확실히 잡아, 이탈리아대표 데뷔도 장식했다. 계속해서 00/01 시즌에는, 본래의 포지션으로 있던 중반센터에서 기용되는 일도 많아지게 되었다.

 요즘의 가투소는 아직, 남아도는 투지와 운동량을 무기로, 무모하게 플레이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어떠한 때에도 손에서 놓친 것을 눈에 핏발을 세우고 뒤쫓는 그의 플레이는, 팀에 있어서 귀중한 하한선이 되고 있었다.

 수비형MF로서 그 능력을 전면적으로 개화한 것은, 안첼로티 현 감독의 시대가 되었기때문일 것이다. 02/03시즌, 안첼로티는, 히바우두, 루이ㆍ코스타, 셰도르프, 피를로와 같은 4인의「10번」을 전원 피치에 내보내는 4-3-2-1시스템을 짜내, 볼포제션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스타일의 공격축구를 실현, 챔피언스리그를 제패하게 된다. 이 4명을 동시에 기용하는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 배후에서 피치를 종횡무진으로 달리며, 빈자리를 메우거나, 볼을 빼앗아 돌려주는 제5의 미드필더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가혹한 일을 감당해내는 것은, 온 세상을 둘러봐도 아마 그 이외에는 다른 누구도 없을 것이다.

 TV에서 밀란의 시합을 보고 있으면, 가투소가 화면에 비치는 것은, 굉장한 기세로 엄습하는 모습이나, 파울을 범해 보기 흉하게 피치에 구르고 있는 모습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진가를 알기위해서는, TV카메라에 비치지 않는 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스타디움에서 한번만이라도 볼 필요가 있다.

 가투소는, 볼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을 때에도 항상 주위를 고루 주시하며, 포지션을 수정하고, 팀메이트에게 지시를 내려, 언제나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다. 기둥처럼 우두커니 서있기는커녕, 걷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도 플레이하는 도중에는 거의 없다. 아군이 곤경에 빠졌을때는 반드시 조력을 위해 달리고, 위험을 알게 되면, 40m, 50m 떨어져있어도 전속력으로 몰아붙여 상대의 찬스를 미연에 방지하는 일도 자주 있다.「내가 상대로부터 10회 볼을 빼앗는 것은, 1골을 넣는 것과 같거나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 가투소에게는 가투소의 일이 있다.」라며 가슴을 편다.

 커리어가 쌓일때마다, 전술안과 테크닉을 조금씩, 그러나 착실하게 향상시키고 있는것은, 나날이 노력한 덕분이다. 지금은, 주위의 테크니션과 비교해보더라도 다소 더듬거리는듯한 둔한 몸놀림이라고 해도, 타이밍을 보고 적진으로 진출, 정확한 움직임으로 공격의 조립에 한 역할을 하는 것도 드물지 않다.

 몸으로 부딪히는 격렬한 플레이스타일에도 불구하고, 큰 부상도 없고, 매년 꾸준히 40경기이상을 소화해내고 있는 것은, 금욕적일정도로 자신을 엄하게 규율하는 라이프스타일덕분이다. 매일 연습 몇시간전에는 밀라넬로에 모습을 나타내며, 제일 마지막으로 피치에서 나온다. 프라이빗도 화려한 나이트라이프와는 일절무관하다. 생활의 모든 것을 축구에 바치고 있다.

 부실을 모르는 것은, 피치 위에서 뿐만이 아니다. 작년 11월, 시합 중에 왼쪽무릎이 비틀리며, 내측인대가 손상된 적이 있었다. 당초의 진단은 전치 2개월. 복귀는 1월 중순이라고 하는 것이 주치의 진단이었다.

 그런데 가투소는, 그것으로부터 35일후에는 이미 피치 위에 서있었다. 매일 많을 때는 6~7시간, 밀라넬로의 체육관 및 풀에서 "귀신과 같은" 재활훈련에 임한 결과였다.

무릎부상의 재활훈련은, 고통과의 싸움이다. 인대의 상처가 원래대로 들러붙을 때까지 고정시키고 있었기때문에 굳어져 구부러지지 않게 된 관절을, 강인하게 움직이고 가능성을 되찾아, 동시에 떨어진 근육을 되찾기 위해서 부하를 걸어간다. 아픔에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로 회복의 기간이 정해진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 같다. 전치 2개월의 부상을 1개월으로 고치기 위해서, 얼마나의 아픔을 그 이를 깨물며 참았겠는가?

「진심으로 모든 일에 임하면, 제대로 된 결과로 되돌아 온다는 것이에요. 그 일을 길게 하고 있으면, 신체의 어딘가가 아픈 것은 당연한 것이야」. 태연하게 그렇게 말한다.

본인 스스로 가능성과 한계를 겸허하게 이해하고, 어떠한 때에도 우직하게 최선을 다하려는 타협이 없는 자세. 그야말로 가투소의 가투소인 것이다.

출처 : Soccer Best Scene(AC Milan Hero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