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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축구(Calcio Italiano)/이탈리아 대표팀(Nazionale)

아주리, 그 영광의 역사(2)


1982년 제12회 스페인월드컵

"월드컵사상 최대의 이변"으로 사상 3번째 월드컵 제패를 이뤄내다.

text by Paul SIMPSON


이 대회의 2차리그 2경기, 사상 최강이라고 불렸던 브라질을 상대로 3-2의 승리를 거두고 라커룸으로 돌아왔던 아주리의 선수중 한명이「뭐야 이건? 똥냄새잖아!」라며 소리쳤다. 그곳에는 가장 위대한 승리를 손에 넣었던것을 축하하는 분위기는 없었다. 그건 평소의 승리를 축하하는 분위기가 아니었을뿐만아니라 평범한 대회는 아니었다는것을 의미했었다.

이탈리아의 미디어는 아주리에 대해 맹렬한 비판을 퍼부었다. 비판이 단순한 억측기사로 바뀌는일도 여러번 있었다. 그리고 미디어가「파올로 로시와 안토니오 카브리니는 잘도 하는구나」라고 보도했을때 대표감독인 엔조 베아르조트는 보도관제를 실시했다. 아주리는 미디어의 취재에는 일절 응하지않을것이라는 강한 자세를 보였던것이다. 1차리그 제2경기 페루전을 1-1로 비겼을때 말타레제회장이「이 팀은 불명예 그 자체다. 라커룸에 가서 선수의 엉덩이를 차버리고싶은 기분이다!」라는 코멘트를 남겼기때문이다. 그리고나서 16일뒤 브라질을 누르고 세계를 경악하게했던 아주리의 엉덩이를 차기위해서가 아닌 기념촬영을 하기위해 라커룸에 내려왔던 말타레제회장을 보고 선수들은 위에서 말한것처럼 노성을 질렀던것이다.

마르코 타르델리는 당시를 회상하면서,「그때 팀에서 약간 품위가 떨어지는 무리가 라커룸의 창문을 열면서 그렇게 소리질렀다」라고 말했다. 베아르조트는 이 사

건에 관해 다음과같이 말했다.「말타레제는 운이 좋았어요. 마침 그때는 선수들과 사이가 좋았던 저널리스트가 축복하러와서 몇명인가는 그쪽으로 가버렸기때문이죠. 그렇지않았더라면, 일대 사건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예의 건"으로 말타레제에 대해서는 모두의 머리에 들어있었기때문이죠」

1982년 스페인월드컵에서는 24개국이 참가했다. 규정은 24개국이 4팀씩 6개의 조로 나눠져서 1차리그를 실시하고 상위 2개국이 2차리그로 진출. 2차리그에 진출한 12개국은 3팀씩 4개조로 나뉘어서 각 조의 선두가 준결승에 진출한다라고하는것이었다. 이탈리아는 1차리그에서 폴란드, 페루, 카메룬을 상대로 모두 무승부, 가까스로 2차리그진출을 확정지었다. 그리고 2차리그에서는 디펜딩챔피언 아르헨티나, 최다우승횟수를 자랑하는 브라질과 같은조에 속하게되었다.  남미의 양대강호국이 결승진출의 자리를 둘러싸고 사투를 벌일것이라는게 대부분의 예상이었다. 그중에서도 브라질의 힘은 다른팀을 압도하지않을까라고도 생각했었다. 특히 토니뇨 세레소, 에데르, 팔캉, 소크라테스, 지코를 앞세운 미드필더진은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미드필더라고 불리고있었다. 그들은 텔레 산타나감독의 지휘아래 공격적인 "죠가 보니또"(아름다운축구를 의미하는 포르투갈어)를 전개. 1차리그에서는 3경기에서 10골을 기록하는등 강력한 브라질의 모습을 보여줬다.

자국에서 개최된 지난 월드컵에서 우승했던 아르헨티나는 그때의 강력한 멤버에 이미 세계최고의 선수라는 칭호를 손에 넣었던 디에고 마라도나를 가세시켰다. 그들은 이번대회에서 압도적인 강력함을 발휘할것이다. 하지만 세사르 메노티가 이끌던 아르헨티나는 개막전에서 벨기에에게 패해버렸다. 그들이 벨기에에게 패전을당한 다음날 잉글랜드와의 포클랜드전쟁이 종결. 그 분쟁으로 오지 알디레스의 사촌이 전사했다라는 소식이 전해졌을때 팀은 슬픔으로 인해 좌절했다. 그런때 어린선수였던 호르헤 발다노는「포클랜드분쟁으로 상처입은 동포를 위해 싸우자!」라며 팀의 사기를 북돋았다. 동시에 그는 팀이 안고있던 문제는 4년전에 우승을 경험했던 베테랑과 새롭게 대표에 가세한 젊은선수들의 관계가 좋지않았다는것을 지적했다고한다. 아르헨티나는 발다노의 사기진작도 있어서 이어서 헝가리, 엘살바도르를 격파하며 2차리그에 진출.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 진짜 문제는 다른곳에 있었다. 팀도 메노티감독도 그들의 새로운 스타, 마라도나가 각국에게 연구되었다라고 확신하지않았던것이 최대의 문제였던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1982년 7월 29일, 바르셀로나의 에스타디오 데 사리아에서 드러났다.이탈리아의 베아르조트감독은 클라우디오 젠틸레에게 마라도나에 대한 밀착마크를 지시했다. 그리고 젠틸레는 멋지게 주어진 역할을 완수했던것이다.


로시 이외에 상대의 수비진을 괴롭히는것이 가능한 선수는 없었다.

『Gazzetta dello Sport』지를 거쳐 현재 FA(잉글랜드축구협회)국제부의 부장으로 일하고있는 세르지오 디 체사레씨는 베아르조트의 전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베아르조트는 (보비)무어라던가 (프란츠)베켄바우어같은 리베로에게 매우 흥미를 갖고있었습니다. 자신들의 볼이 된 순간, 그들 2명이 수비수에서 미드필더로 변신한다라고하는 방법론에 호감을 갖고있는듯했어요」

확실히, 베아르조트감독이 사용한 3-5-2에서는 리베로가 가에타노 시레아와 카브리니가 몇차례 공격에 가담했다.「문제는 어떻게 볼을 움직여야 자신들의 스태미너를 보존할수있을까라는것이었다. 즉, 어떻게하면 볼을 빠르게 횡으로 운반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라고 디 체사레씨는 말했다. 골키퍼 디노 조프가 골마우스에 들어가며 강력한 수비를 자랑한 아주리의 미드필더를 지배했던것은 트레콰르티스타 지안카를로 안토뇨니였다. 디 체사레는 말했다.「안토뇨니는 시즌이 개막하자마자 상대 골키퍼와 충돌해서 이틀간 혼수상태에 빠졌습니다.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들정도의 큰 부상을 당했던 그는 완벽한 컨디션이라고는 말하기 어려운 상태였죠. 그럼에도 영리한 플레이와 높은 정확도의 패스, 그리고 공수밸런스가 좋은 미드필더의 리더로서 기능했습니다」

공격진에서 베아르조트감독이 신뢰했던것은 도박스캔들로 받은 장기간의 출장정지처분에서 피치에 갓 복귀한 로시뿐이었다. 감독은 장기간 전열에서 이탈했던 로시를 아주리에 소집하는것에 망설였다고 말했다.「78년 월드컵에서는 파브리토(로시의 애칭)는 (로베르토)베테가의 파트너로서 그리고 세컨드어태커로서 매우 좋은 플레이를해줬습니다. 지금은 베테가가 없습니다. 만약 다른 좋은 공격수가 있다면 파브리토를 소집하지않을것입니다. 경기감이 떨어진듯한 선수를 월드컵같은 대무대로 데려가서 기용하는것은 큰 도박이었습니다. 월드컵은 과거의 실수를 속죄하기위한 대회가 아니라고도 생각했었죠. 하지만 제가 하려고했던 축구에서 가장 득점력이 뛰어나다고 할만한 남자는 누구냐고 묻는다면 파브리토 이외에는 없었을것입니다. 그를 제외하고 페널티에어리어 안에서 상대의 수비진을 괴롭히는것이 가능한 선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로시는 1차리그 첫경기 페루전에서 플레이할수있는 상태가 아닌듯했다. 로시 본인은「그때는 다리에도 눈에도 리듬이 전혀 없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대회직전에 베아르조트감독이 실시한 경기감각을 되찾기위한 하드트레이닝으로 지쳤을것이다. 하지만 2차리그에 돌입한 이후부터 로시의 움직임은 달라졌다. 2차리그 첫경기 아르헨티나전에서의 2골은 로시의 골이라고 말해도 좋을정도의것이었다. 중앙을 돌파한 로시가 쏫 슛은 골키퍼 우발도 피욜에게 막혔지만 흘러나온 볼을 골앞에서 잡은 카브리니가 밀어넣었고 스코어를 2-0으로 벌렸던것이다.

또, 이날의 선제골은 확실히 베아르조트감독이 생각했던 "볼을 돌리는 축구"의 결과였다. 자기진영 왼쪽측면에서 볼을 빼앗은 카브리니는 우선 하프웨이라인 직전까지 내려와있었던 로시에게 볼을 건넸다. 패스를 받은 로시는 즉시 오른쪽측면의 브루노 콘티를 달리게했다. 콘티가 원터치로 반대측면의 다르델리에게 패스를 보내자 타르델리는 그것을 페널티에어리어 주변에 있었던 안토뇨니에게 패스. 안토뇨니는 슛을 때린다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그는 왼쪽측면에서 중앙으로 침투하던르델리에게 패스를 보냈다. 그것을 타르델리가 넣은것이지만 이것이야말로 베아르조트감독이 생각했던 "볼을 돌리는 축구"였던것이다. 경기종료까지 남은 7분의 시점에서 아르헨티나는 다니엘레 파사렐라가 프리킥으로 1골을 만회했지만 반격하기에는 너무나도 늦었다. 이렇게해서 디펜딩챔피언 아르헨티나가 준결승에 진출하기위해서는 적어도 브라질을 누르지않으면안된다라는 상황에 빠졌던것이다.

아르헨티나 vs 브라질은 전반 11분에 빠르게 경기가 움직였다. 크로스바를 때린 에데르의 프리킥에서 흘러나온 볼에 반응한 지코가 골을 넣으며 브라질이 리드를 빼앗았다. 그 이후 서서히 브라질의 강력한 미드필더진이 경기를 지배하게되었다. 그리고 지코의 멋진 2번의 패스가 승패를 결정지었다. 후반 21분, 지코의 패스를 받은 팔캉이 크로스를 올렸고 그것을 세르지뇨가 머리로 밀어넣으며 추가골. 추가로 그 골이 터진뒤 9분후에는 지코가 수비수 2명에게 둘러싸이면서도 정확한 패스를 보냈고 그것을 주니오르가 넣은 시점에서 승패는 결정되었다. 경기종료직전에 라몬 디아스의 득점으로 아르헨티나가 1점을 만회했지만 밑빠진 독에 물붓기였다.


이탈리아와 브라질국민의 기억에 남아있는 로시의 멋진 해트트릭

아르헨티나가 2패를 당하며 2차리그 탈락이 확정되며 준결승진출을 걸고 70년 멕시코월드컵에서 결승전에서 맞붙었던 이탈리아와 브라질이 다시 격돌하게되었다. 70년대회 결승에서 이탈리아를 압도했던 브라질은 자신으로 가득차있었다. 경기전 수비수 오스칼은「우리들이 1-0으로 승리할것이다. 그 결승골을 넣는것은 우리다」라며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텔 산타나가 이끄는 셀레상은 상대를 완벽하게 봉쇄하기보다 대량득점을 빼앗는쪽이 간단했었을것이다. 브라질은 1차리그에서도 소련을 상대로 1실점, 스코틀랜드에게도 1실점을 허용했다. 그들이 유일하게 완벽한 봉쇄를 했던것은 축구를 하기보다 브라질의 선수와 유니폼교환을 하는것에 흥미를 갖고있었던 뉴질랜드뿐. 브라질이 준결승에 진출하는데는 무승부로도 충분했었다. 하지만 브라질에게 무승부를 노리는 축구는 맞지않는다. 무대가 되었던 바르셀로나의 에스타디오 데 사리아에서 텔 산타나감독은 평소대로의 공격적인 시스템, 2-7-1로 이탈리아를 덮치려고했다. 하지만 그런 공격적인 작전에 큰 함정이 기다리고있었다. 세간에서 말해지는 "사리아의 비극", 월드컵사상 최대의 이변중 하나라고 불리는 경기가 시작되었던것이다.

이변은 킥오프 이후 불과 5분만에 찾아왔다. 측면에서 콘티가 드리블을 개시. 30미터 이상이나 볼을 앞으로 운반한뒤 오버랩했던 카브리니에게 패스했다. 그리고 카브리니가 절묘한 크로스를 올리자 상대수비수의 마크를 완벽하게 제친 로시가 점프하지도않고 간단히 머리로 골을 넣었던것이다.

로시의 선제골을 지코와 소크라테스를 진심으로 경기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전반 12분, 지코는 수비수 3명을 제치고 소크라티스에게 패스. 그것을 받은 소크라테스가 각도가없는곳에서 땅볼슛으로 넣으며 동점으로 추격했다. 그 시점에서 경기의 주도권을 브라질이 쥐게될것으로 생각했으나 전반 25분, 토티뇨 세레소가 주니오르에게 보내던 패스를 로시가 가로채며 그대로 날카로운 슛을 날렸고 골키퍼 발디르 페레스를 무너뜨렸다. 큰소리로 뭔가를 계속해서 외치던 노티뇨 세레소에게 주니오르는「그정도에서 좀 조용히해! 이 이상으로 계속 떠들어댄다면 한방 갈겨줄테야!」라며 소리를 질렀다.


브라질은 확실히 동요했었다. 토니뇨 세레소는 하프타임 도중에 라커룸에서 레안드로와도 격한 논쟁을 주고받았다고 들었다. 후반에 들어와서 그 토니뇨 세레소가 전반의 실수를 만회하는 플레이를 했다. 후반 23분, 그의 미끼가 된 움직임이 팔캉에게 공간을 만들어줬다. 팔캉은 강력한 슛으로 골키퍼 조프를 무너뜨렸던것이다.동점골을 넣은순간 팔캉은 마치 결승진출을 확정짓기라도한것처럼 온몸으로 기쁨을 표현했다. 하지만 그 골이 들어가고 6분뒤 브라질은 또한번 이탈리아에게 리드를 빼앗기게된다. 타르델리의 예리한 코너킥으로 혼란해진 브라질은 로시를 골앞에서 프리로 놔뒀던것이다. 로시는 실로 간단하게 해트트릭을 달성해보였다.

로시의 해트트릭은 다음날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도박 스캔들에서의 완전부활은 헐리우드스타와 비슷할 정도의 화제를 불러왔다. 하지만 이 경기의 진정한 주역은 안토뇨니였을지도모른다. 그는 이탈리아의 카운터어택의 모든곳에서 기점이 되었던것이다. 아쉽게도 오프사이드가 되었지만 카브리니에게 보냈던 라스트패스는 고평가에 적합한것이었다. 브라질전에서의 안토뇨니는 아주리의 미드필더 속에서 경기를 멋지게 지배했던것이다. 지코에게 있어 이 패전은 그의 축구철학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이 패전이후 그는「아름다운 축구를 하더라도 패한다면 의미가 없다」라고 생각하게되었다고 들었다. 베아르조트감독은 브라질전에서의 승리를 이렇게 파악했다.「아르헨티나전에서 승리를 손에 넣었을때 주위는 조용했었죠. 하지만 브라질에게 승리하자마자 칭찬의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미디어의 태도는 천박했어요. 브라질전을 앞두고 미디어는『이탈리아는 카운터어택밖에 할수없다』라고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줬으면합니다. 브라질전에서 3번째골은 코너킥에서 나왔다는것. 그순간 브라질의 선수는 11명 전원이 페널티에어리어 안에 들어와서 수비하고있었습니다. 모두가 수비하고있을때도 우리는 골을 빼앗아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수비적이다! 카운터어택밖에 할수없다!』라고 질책받지않으면안되는것인가요?」

경기종료후 브라질의 라커룸은 어둡게 가라앉아있었다. 흐느끼는 선수까지 있었다. 그런와중에 텔 산타나감독은 선수들에게 조용히 말을 걸었다.「모든것은 끝났다. 너희들은 최선을 다했다. 그것으로 되지않았나...」

아주리는 준결승에서 폴란드, 그리고 결승에서는 서독을 누르고 사상 3번째 월드컵우승을 이뤄냈다. 베아르조트감독은 대회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브라질전에서 승리를 거둔 시점에서 우승할수있을거라고 확신했었죠. 사상최강이라고 불리던 브라질에게 승리했기때문에. 그 승리가 팀 전체에게 큰 사진감을 가져다준것은 확실해요」

확실히, 이 대회의 브라질에는 사상최강의 미드필더진이 있었다. 지코, 소크라테스, 팔캉, 에데르의 미드필더진은 확실히 세계최강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어색한 움직임으로 항상 팀 전체에 불안감을 가져다줬던 골키퍼가 있었던것도 확실하며 수비라인도 단단하다고는 말할수없는것이었다. 그리고 강력한 미드필더진에 비교하면 1톱에 배치된 세르지뉴의 역부족은 부정할수없었다.

브라질전의 영웅이 되었던 로시는 그 이후의 생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지금도 이탈리아에서는 그 경기가 화제에 오릅니다. 브라질전에서의 해트트릭을 이탈리아에서는 누구나 기억해주고있죠. 저는 사람들의 기억의 일부가 된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의 이름은 또한, 브라질국민의 마음에도 깊게 새겨졌다. 경기종료후 로시의 천재적인 플레이를 칭찬한 텔 산타나감독은 리우 데 자네이루의 공항에서 썩은 과일을 투척당했다. 몇주뒤 브라질 전역에 인플루엔자가 만연. 브라질의 미디어는 즉시 그것을 "로시형 인플루엔자"라고 명명했다.




82년의 골든보이 - Paolo ROSSI

이탈리아에 3번째 세계챔피언의 타이틀을 선사한 파올로 로시.
1982년에 세계를 석권한 그가 당시를 이렇게 돌아봤습니다.

Interview and text by Matthew BARKER

파올로 로시는 1978년 아르헨티나월드컵에서 3골을 기록하며 아주리의 주역이 되었다. 하지만 80년에는 승부조작의혹에 연루되며 3년간의 출장정지처분을 부과받았다. 이때문에 82년 스페인월드컵에는 출전할수없을것이라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로시는 무죄를 주장. 이후에 고발인중 한명이 혐의의 일부가 조작되었던것을 고백하며 최종적으로 로시의 출전정지처분은 2년으로 경감되었다.

이것은 아주리의 감독인 엔조 베아르조트가 애타게 기다렸던 판결이었다. 그는 즉시 스페인월드컵으로 향할 아주리에 로시의 이름을 기입했다. 감독에게 있어 2년간의 출전정지에 의한 경기감각의 결여같은건 문제가 되지않았던것이다. 하지만 월드컵 1차리그에서의 플레이를 보는한 로시를 대표로 불러들인것은 실수였던것일까라고 생각할수있었다. 그럼에도 베아르조트감독의 로시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로시는 브라질전에서 멋진 해트트릭을 달성하며 감독의 신뢰에 부응했다. 로시는 준결승 폴란드전, 추가로 결승 서독전에서도 골을 넣었다. 스페인 땅에서 이탈리아를 세계최고로 이뜸과 동시에 대회득점왕과 MVP 타이틀을 손에 넣었던 그가 영광의 날들을 되돌아봤다.


1경기에서 3골을 넣었어도 실감은 그다지 솟아나지않았다.

항상 스페인월드컵에서의 쾌거가 화제가 된다고 생각하지만 당신에게 있어 "영원한 짐"이 되는것은 아닐까요?

로시(이하 R) - 저는 항상 82년의 이야기를 하지않으면안되는것같네요. 하지만 부담같은건 없어요. 스스로 축구선수로서의 과거를 돌아보는것은 기쁜일이기도하니까요. 제 축구인상은 언제나 기쁨으로 가득차있었던건 아닙니다. 문제도 있었죠. 당시 저는 혼자 틀어박혀지내는 타입이었죠. 지금도 그렇지만... 다만 그것이 프레셔가 되는일같은건 없습니다. 적어도 지금은 말이죠.


스페인대회에서의 최고의 추억은?

R - 2차리그에서 대회의 우승후보로 비춰졌던 브라질을 상대로 해트트릭을 했을때라고 생각할거에요. 하지만 실은 달라요. 알고있나요? 1경기에서 3골을 넣더라도 실감은 그다지 솟아나지않았어요. 확실히, 돌이켜보면 대단한일을 해냈다고 생각하지만요. 다만, 실제로 피치위에서 느꼈던것은 전혀 다른것이었죠. 팀의 승리에 공헌할수있을만한 플레이를 할수있으면 행복한 기분이 들죠. 제가 넣었던 골이 팀에게 승리를 가져다준다면 기쁨은 배로 늘어납니다. 하지만 실제로 피치위에서 생각했던것은 다음에 어떤 플레이를 할까밖에 없어요. 앞으로 어떤 시합전개가 될것인가, 그것만 생각하는거죠. 경기종료후에도 해트트릭을 달성했던것을 진심으로 기뻐하지는 않았습니다. 아직 대회기간중이라고 의식했기때문일거에요. 곧바로 준결승에 대해 생각했었죠. 월드컵에서는 언제나 다음 경기를 생각할 필요가 있어요.


베아르조트는 어떤 타입의 감독이었나요? 당신의 인생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었던건가요?

R - 베아르조트는 제 인생에서 괴로운 시기에 저를 신뢰해줬습니다. 그점에 관해서는 진심으로 감사하고있어요. 그는 제가 2년동안의 블랭크를 이겨내고 골감각을 되찾는데 손을 빌려줬죠. 축구를 다시 즐기는것이 가능해졌던것, 자신감을 되찾았던것은 모두 그의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제 인생에 큰 영향을 준 사람의 이름을 들어달라고 질문받는다면 주저없이 베아르조트의 이름을 댈거에요. 그정도로 제게 있어서는 특별한 사람이죠.


월드컵기간중 이탈리아의 분위기는 어땠었나요? 이탈리아의 미디어와는 꽤 긴장상태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만.

R - 매우 특수하고 팽팽한 분위기였다고 말해야하려나. "사면초가"라고 느꼈었죠. 하지만 우리는 그런 상황을 우리들에게 유리한것으로 만들었지만요.


그런 큰 압박속에서 월드컵을 즐기는것은 어렵지는 않았나요?

R - 82년, 저는 월드컵우승과 발롱도르 수상을 경험했죠. 그런때도 항상 축구이외의 일을 생각했었습니다. 그렇게하는것으로 기분을 전환했던거죠. 현역시절은 항상 다른것을 생각했었어요. 그렇게하는것으로 땅에 발을 붙이고 인생을 겉고있다는 기분이 들었죠. 저는 토스카나의 농장에서 와인과 올리브오일을 만들거나하는걸 좋아해요. 4월 이후의 토스카나는 최고죠. 노동하면서 휴식을 취할수있다니 최고의 환경이죠? 축구의 세계에서는 결코 손에 넣을수없는것을 지금 손에 넣었다고끼고있다고해야하나.


아주리의 팀메이트를 초청해서 잔을 나눴던적은?

R - 가끔 하고있죠. 우리는 지금도 사이가 좋아요. 어떤 종류의 인연이 있다고해야하나. 과거의 팀스피릿이 지금도 남아있는거죠. 82년의 유산이라고 말할만한것이 지금도 존재하는것입니다.


출처 : 월간 칼치오2002 2010년 7,8월 합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