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by Giuseppe DELLA MORTE
이탈리아남부는 우수한 축구소년의 명산지이다. 많은 인재가 그곳에서 태어났고, 자랐으며, 프로축구선수가 되고싶다라는 꿈을 갖고 북쪽으로 향한다. 하지만 그중 압도적 다수는 꿈을 만족시키지못하고 안토니오 디 나탈레의 성공을 눈으로 보면서 고향으로 돌아가게된다. 프로축구선수를 목표로하는 남부의 어린이들의 상황을 레포트로 써본다.
이탈리아남부에서 북부도시로 향하는 장거리버스에는 큰 스포츠백을 든 아이들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명문클럽의 유스팀의 선발테스트를 받으러간다. 자신의 잠재력을 보여줄 기회를 늘리기위해 기회가 적은 남부를 떠나 보다 큰 가능성이 기다리고있을거라고 생각되는 북쪽을 목표로하게된다.
왜 남부에는 기회가 적은것일까. 캄파니아를 예로 들어보면 각 클럽에는 선수발굴과 육성에 대한 정열은 있어도 조직으로서 기능하고있지못하다는점이 눈에 띈다. 지금도 역시 이것저것이 "남부다운" 좋은 조절아래 운영되고있고 기회를 요구하는 아이들은 스스로 길을 개척하지않으면안된다. 캄파니아의 축구소년은 적극적으로 자기어필이 가능하다는 경향이 있다. 가족에게서 떨어져사는것을 그만큼 괴로워하지않는다라는것도 이 지역의 아이들의 특징이다.
세리에A에서 플레이하는 선수의 출신지를 보면 캄파니아는 롬바르디아에 이어 2위다. 하지만 이 수치로는 북이탈리아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이민한 사람들의 사이에 태어난 "2세"가 포함되어있지않다. 캄파니아에 뿌리를 둔 선수는 가장 많다라는것이다. 세리에A에서 플레이하고있는 캄파니아출신선수는 40명. 세리에B도 포함시키면 그 수치는 30퍼센트로 늘어난다. 3부, 4부인 레가 프로까지 넓히면 어떤 클럽의 라커룸에서든 나폴리방언이 이리저리 뒤섞이는 상황이다(나폴리는 캄파니아의 주도).
1000명중에 1명
레체출신으로 창조성넘치는 플레이를 특기로하는 윙 프랑코 카우시오는 1970년대에 유벤투스의 주력선수로서 팬을 매료시킴과 동시에 북이탈리아에서 살고있는 남부출신 사람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카우시오는 성공을 꿈꾸며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주한 사람들에게서「이민의 왕자」라고 칭송받았던것이다. 그 흐름은 지금도 계속되고있고 많은 축구소년이 카우시오의 성공을 되풀이할 생각으로 북쪽을 목표로하고있다.
하지만 현재 축구계는 비지니스화로 나아가고있지만 아직 세련되었다고 말하기란 어렵다. 복잡한 돈의 흐름속에 수상한 관계자가 다수 돌아다니고있는 세계인것이다. 그중에는 엉터리 에이전트도 있고 정식 라이센스를 갖고있지만 의지를 잃은 에이전트도 있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구두약속을 믿게하지만 그중 다수는 휴지조각이 된다. 성공을 거두는것은 1000명중에 1명. 남은 몇할정도는 수상한 일당의 먹잇감이되며 그때까지는 친구같았던 축구에게 배신당하는 기분을 맛본다. 그리고,「미래에 대한 가능성이 모두 사라졌다」라며 재기불능상태에 빠진뒤 고향으로 돌아간다.
90년대후반,「작은 마라도나」라며 떠들썩했던 소년이 있었다. 빈첸초 사르노. 그도 또 꿈이 사라진 아이중 한명이다. 그의 성공담은 크게 보도되었지만 진짜 성공에는 미치지못했다. 오히려 재능넘치는 아이가 망가지기까지의 경위를 세간에 보여준 전형적인 케이스가 되었던것이다.
나폴리교외의 축구스쿨에 다녔던 빈첸초는 11세때 느닷없이 고액의 계약금을 제시받아 토리노의 유스팀에 입단한다. 하지만 그 연령대의 어린이에게 잇어 갑자기 가족에게 떨어져 기숙사에서 생활하는것은 큰 스트레스였다. 결국 그는 토리노에서의 생활을 견디지못했고 겨우 1개월만에 본가로 돌아온다. 당시 1억2천만리라의 가격표가 붙어있었던 그는 지역클럽에 일시적으로 복귀했지만 이번에는 로마로 이적하게된다. 하지만 센시패밀리에게서 인정받지못했기때문에 빈첸초의 빅클럽에서의 도전은 끝났다. 16세가되서 실력의 낙인이 찍힌 그는 세리에C의 산 죠반네제와 줄리아노바에서 플레이. 브레시아로 이적하며 세리에B로 카테고리를 끌어올렸지만 그뒤에는 다시 세리에C의 포텐짜와 프로 파트리아에서 플레이하게되었다. 그의 이름이 미디어에서 다뤄지게된것은 프로 파트리아시절에 급료미지급으로 클럽을 고소했던것정도. 이후에도 머무르기 좋은 장소를 찾아 여러 클럽에서 플레이하게된듯하지만 소년시절에 기록적인 이적료로 토리노와 게약했을때처럼 스포츠지의 1면을 장식하는일은 이제 없다.
소리없는 소년들
캄파니아는 남이탈리아의 다른 지역보다도 아직도 느리다. 사르토의 케이스를 본 어른들의 사이에는 10대전반의 선수를 좀더 보호하지않으면안된다는 의식이 높아졌고 조직적인 교육을 실시하는 축구교실도 늘어났다. 하지만 나폴리와 그 주변에는 변함없이 어딘가 미심쩍은 인물이 항상 "사냥감"을 노리고있다는 상황이다.
캄파니아와 비교하면 프리아와 칼라브리아, 시칠리아는 10대전반의 아이들의 육성에 적극적이다. 프리아에 본거지를 둔 바리와 레체, 칼라브리아의 레지나, 시칠리아의 팔레르모와 카타니아는 몇년전부터 연고지의 스카우트망을 충실하게했고 유스팀에도 전문가를 고용하게되었다. 어린선수들의 발굴과 육성에 "적절"한 투자를 하게되었다는것이다.
어떤 시골이라고해도 재능을 가진 아이가 있다면 스카우트는 그곳으로 발을 옮기고 그의 잠재능력을 체크한다. 재능있는 아이는 복수의 클럽의 선발테스트를 받아 합격하면 선수로서의 육성에 추가로 교육도 받게된다. 교육은 결코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프로가 될수없는 경우에 대비해두는것은 그 이후의 긴 인생을 생각함과 함께 중요하며 그것은 동시에 프로선수로서의 성공을 거두기위해서는 불가결한 규율을 몸에 익히는것이기도하다.
사르토의 이야기는 크게 보도되었지만 꿈을 잃은 소년들의 대다수는 누구에게도 알려지지않은채 커리어를 마치는 "소리없는 소년들"이다. 로베르토 팔코네도 그중 한명. 어렸을때부터 재능의 일부를 보여줬던 로베르토는 9세때 나폴리 근교의 산탄토니아 아바테촌의 축구교실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골을 양산하는동안 벨기에의 안더레흐트와 샬르로아, 네덜란드의 비테세가 영입에 흥미를 보였다. 물론 이탈리아의 클럽오 이 재능을 놓치지않았다. 인테르, 나폴리, 레체같은 세리에A의 단골이 스카우트를 파견했고 로베르토의 능력을 체크함과 동시에 양친에게 이적을 권유했다. 그런 쟁탈전을 제압했던것은 유벤투스였다.
로베르토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나는 단지 플레이할뿐. 다양한 클럽의 테스트를 받았지만 모든 스카우트가 수배해서 교통비도 체재비도 지불해줬습니다. 스카우트는 제 부모님들에게『로베르토를 맡겨주십시오』라고 항상 말했었죠」
그 스카우트의 눈은 확실했었다. 로베르토는 유베의 죠바니시미(13세이하의 카테고리)에서 대활약했다. 골을 양산하는 로베르토는 당시의 팀에서 가장 빛나는 존재엿다. 그후 알리에비(16세이하의 카테고리)로 승격되서 세바스티안 지오빙코 및 다비드 란자파케와 함께 플레이. 유니오레스(17세이하의 카테고리)를 이끌던 마시모 팔란카감독은 그의 플레이를 보고 월반으로 팀에 합류시켰다.
이때까지 로베르토의 커리어는 순풍에 돛을 단것같았다. 그대로 유베의 톱팀으에 도달하게되든 다른 클럽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게되든 엘리트커리어로가는 길은 보증되었다고 누구나 생각했었다. 하지만 호사다마라던가. 무릎부상을 계기로 그의 커리어는 단숨에 추락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로베르토는 말했다.「클럽은 진심으로 내 치료에 임해줬습니다. 하지만 수술을 받을때 무릎에 세균이 침투해버렸고 수술후의 경과가 좋지않았죠. 복귀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릴것이라고 예상했던것일까, 그때부터 클럽의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클럽측에게 버림받았다라는것을 확실히 느꼈어요」
그후 그는 메시나로 방출당했고 그때부터 이리저리 떠도는 여행을 강요받게되었다. 엘리트가도에서 제외되자마자, 그때까지 여러모로 귀찮게했던 스카우트와도 연락이 닿지않게되어버렸다. 낯선 현장속, 갑자기 고립무원의 상황에 처한 로베르토에게 있어 상담이 가능한 상대는 부모뿐. 그는 4부의 포텐짜와 안드리아에서 플레이한뒤 그곳에서도 전락. 현재는 디레탄티보다도 아래의 카테고리에서 축구선수로서의 커리어를 가까스로 이어나가고있다. 이탈리아 굴지의 명문, 유베의 유스팀에서 에이스엿던 선수더라도 한순간 잘못되면 즉시 그곳에서 추락해버린다.... 로베르토의 경우 부상을 당했을때 치료에 좀더 확실했었더라면 원래 가졌던 재능에 걸맞는 커리어를 쌓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세계는 약육강식이 원칙이며 서포트해줬던 누군가가 항상 곁에있다고는할수없다. 뭔가 문제가 발생해버린다면 버려진다라고하는 경우는 무수히 존재하는것이다.
스카우트라고하는 직업
가난한 남부에는 본격적인 피치와 연습시설이 적고 아이들이 재능을 늘릴만한 환경이 갖춰져있지않다고 지적받아왔다. 하지만 이전과 비교하면 상황은 꽤 개선되었다고도 볼수있다.「남부에 많은 인재가 잠자고있다」라는것을 스카우트가 의식하게되었던것도 크다.
캄파니아에서 재능있는 젊은선수의 발굴을 오랫동안 계속해왔던것이 로렌초 다마트(사진)이다. 그는 방위성의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나폴리근교의 마을 카스텔로 디 치스테르나에 USD 산 니콜라라고하는 클럽을 설립했다. 라커룸, 체육관, 세탁소, 의무실, 클럽오피스 등 충실한 시설이 갖춰진 스타디움을 갖고있을뿐만아니라 육성에 정평이 나있는 엠폴리와 사무제휴를 맺으며 "남쪽에서 북쪽으로가는 핫라인"을 구축했다. 다마토는 지금까지 많은 젊은선수를 발굴, 육성했고 엠폴리를 필두로하는 북부클럽으로 보내왔다. 차세대 아주리의 센터포워드가 이곳에서 배출되더라도 이상하지않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다마토는 이미 그 과제를 완수한것이다. 아주리에서 활약중이며 지난시즌 세리에A 득점왕이기도했던 공격수 디 나탈레는 이 클럽의 출신인것이다. 과거의 카우시오, 얼마전의 빈첸초 몬텔라에 이어 지금은 디 나탈레가 북쪽을 목표로하는 남부의 어린이들의 목표가 되고있다.
성공의 비결은 무엇일까. 다마트는 젊은이들이 빠지기쉬운 함정에 대해 말했다.「멋진 재능을 가진 아이가 보잘것없는일로 자신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축구를 아무리 잘하더라도 인생경험이 거의 없는 소년이라는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항상 상태를 지켜보고 적절한 조언을 해서 우쭐거리지않게 지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말을 걸고 대화를 합니다. 결국, 중요한것은 커뮤니케이션이에요」
디 나탈레는 어떤 아이였을까. 그리고 다마트는 어떤 지도를 했던것일까.「축구를하는것밖에 머리속에 없었죠. 엠폴리의 유스팀에 입단했을때도 1개월정도 지난뒤에 돌아왔어요.『공부가 너무 엄격해서 이제 싫어요』라고 화를 내면서... 물론, 저는 그를 설득했었죠. 공부도 하지못하면 캄피오네는 될수없어. 다만, 그를 설득하기까지는 8개월이 걸렸어요」
엠폴리의 담당자에게도 물어봤다. 마르첼로 카를리SD에 의하면 캄파니아출신의 젊은선수는 뭔가 다른것을 갖고있는듯했다.「캄파니아의 아이들은 성공이 빠릅니다. 창조력과 생명력이 흘러넘치는것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선천적으로 가진 "교활함"은 플레이하는데있어 빼놓을수없는것이고 지도해서 몸에 익힐수있는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엠폴리는 그런 젊은이들의 테크닉을 늘리고 규율을 심어준다고하는 점에서 최적인 환경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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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파니아의 아이들은 선천적인 "교활함"을 몸에 익히고있다.... 나로서는 그 말이 진실을 표현하고있다고 생각하지않는다. 북쪽의 사람으로 보면 가난한 남부에는 누구나 이해타산에 밝고 만만치않은것처럼 보일것이다. 하지만 남부출신의 축구선수의 "교활함"은 또 다른것은 아닐까. 그것은 천성의 것이 아닌 가혹한 생존경쟁을 이겨내기위해 몸에 익히지않으면안되었던것이다. 그리고, "교활함"을 몸에 익히지못한자는 엠폴리같은 "빅클럽"의 유스팀에 도달하기전에 도태되어버리기때문에 우리 축구팬의 눈에는 머무르지않는다....
빈첸초 사르노와 로베르토 팔코네도 재능은 있었지만 조금 순진했었기때문에 도태의 대상이 되어버렸을것이다. 성공을 거두는것은 1000명중에 1명. 나로서는 그 말이 매우 무겁게 느껴진다.
출처 : 월간 칼치오2002 2011년 3월호
'이탈리아 축구(Calcio Italiano) > 세리에A'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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