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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사이먼 쿠퍼 정기칼럼

[사이몬 쿠퍼 정기칼럼] 떠나는 반데사르에게 바치는 경의 - 혁신적인 이상상


장신에 여윈 몸. 가벼운 몸놀림으로 양발을 사용해서 볼을 다루는 에드윈 반 데 사르는 GK상을 변화시켰던 하나의 혁신자였습니다. 이번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 전설에게 동포이자 같은 연배인 사이몬 쿠퍼가 경의를 바칩니다.

text by Simon KUPER

저자 프로필

사이먼 쿠퍼 : 유럽을 대표하는 저술가. 영국경제잡지『파이낸셜 타임스』등에서 집필을 맡고있습니다. 스포츠를 인류학적 견지로 고찰하는 새로운 저널을 개척했고 1994년 축구의 이면을 다룬 획기적인 명저『축구의 적』을 상신. 윌리엄 힐이 주최한「Sportsbook of the Year」을 수상했습니다. 우간다출신의 잉글랜드인이며 네덜란드, 미국, 스웨덴, 자메이카에서 자라 잉글랜드와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세계적인 배경의 소유자입니다. 69년생.


골키퍼의 역사를 풀어보면,「반데사르 이전」 과「반데사르」이후로.

1991년 어느 4월의 오후, 아약스 암스테르담의 골키퍼 스탠리 멘조는 가벼운 부상을 당했다. 그 대체자로 한명의 청년이 피치에 섰다. 그의 모습을 봤던 사람들은 웃음을 감추지못했다. 귀가 큰 20세의 청년은 매우 말랐고 마치 철도의 레일같았다. 자색의 유니폼에 푸른 쇼트. 웜업을 위해 페널티에어리어 근처에서 뛰던 그는 축구선수라기보다 체조선수같았다. 

그 이후 20년이 지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유나이티드)의 골마우스에 군림하는 수호신은 이번 여름에 은퇴할것을 결심했다. 에드윈 반 데 사르. 그는 현대축구에 있어서 골키퍼의 개념을 뿌리부터 뒤집어놓은 남자였다. 

골키퍼의 역사를 풀어보면,「반데사르 이전」과「반데사르 이후」로 분류할수있다. 반데사르 이전의 골키퍼는 지금도 잉글랜드 골키퍼의 한 축으로서 그들의 생존을 확인할수있다. 그들은 보기흉한 곰처럼 볼을 잘 차지못한다라는 이유로 골마우스에 배치된 남자들이다. 노렸던 방향으로 볼을 보내는것조차 마음대로 되지않는다. 스펙터클한 세이빙으로 칭찬받으며「키퍼는 크레이지하지않으면 맡을수없다」라는 격언 그대로의 커리어를 보내며 30대 중반에 은퇴를 결심한다.

반데사르는 그런 골키퍼상을 바꿨던것이다. 나는 그의 커리어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지켜볼수있었다. 그와는 나이가 한살 차이나는 동년배이며 고향은 5마일(약 8km)도 떨어지지않았다. 1m97cm라고하는 신장은 네덜란드의 그 지역에서는 매우 큰 부류에는 속하지않는다. 1872년 전후의 카르반파의 목사를 떠올리게하는 창백한 얼굴. 소년시절부터 축구에 흥미를 느꼈지만(당시는 골키퍼가 아니었다), 프로가 될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못했다고한다.

1988년 어느날밤 아약스는 반데사르를 트라이얼에 호출했다. 세컨드팀에서의 실전. 스타디움은 그의 떠들썩한 친구들을 제외하면 텅텅 비어있었다. 선견지명이 있었던 그 친구들은 이때 이런 배너를 걸었다고한다.「반데사르를 네덜란드대표로」. 그뒤 그는 오렌지의 유니폼을 130번이나 입게된다. 그것은 네덜란드대표사상 최고의 수치이다.

20대 전반기에 아약스의 수호신으로 군림하며 챔피언스리그 우승 등 승리를 손에넣었다.
모든 의미에서 골키퍼의 개념을 뒤엎었다. 

아약스가 반데사르의 영입을 결정했을때 그때까지 아마추어팀에서 그를 지도했었던 코치는「육성비」로서 1500길더의 사례를 받았다. 당시 그것은 젊은 골키퍼의「발굴비」로서는 그런저런 금액이었다. 그리고 이 마르고 키가 큰 청년이야말로 네덜란드가 계속해서 찾아왔던 이상적인 골키퍼였다는것이 판명되기까지 시간은 얼마 걸리지않았다. 명장 리누스 미헬스와 함께 토탈사커를 완성시켰던 요한 크루이프는 골키퍼의 이상형을 이런식으로 그리고있었다. 그것은「글러브를 낀 필드플레이어」라고하는것이었다.

골키퍼는 날아드는 슛을 막아내기만하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면 선수 한명을 낭비해버린다. 크루이프는 그렇게 생각했고 "축구를 할수있는"골키퍼를 원했던것이다.「10명이 아닌 11명이 필드위에서 플레이하고 그중 한명이 필요에 응해 세이빙을 보여준다. 그런 팀이 가능하다면 완벽하지않을까」. 크루이프는 이렇게 말했지만 반데사르는 틀림없이「글러브를 낀 필드플레이어」였다. 그는 양발로 볼을 다룰수있다. 원터치패스를 구사할 수 있고,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공을 뺏으러 달려오는 상대 공격수를 한명정도 제치는것도 가능하다. 골키퍼가 되지않았더라도 틀림없이 필드플레이어로서 성공했을것이다. 그것도 꽤 유명한 선수가 되었을것이다. 94년 미국월드컵. 골키퍼로서의 출전기회는 없었지만 반데사르는 플로리다에서 실시된 네덜란드대표의 연습경기에서 화려한 플레이를 선보였다. 필드플레이어로서말이다. 크루이프는 그런 그를「아약스(당시의 소속클럽)에서 최고의 공격수」라고 칭찬했던것이다.


왠만해서는 감정을 드러내지않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냉정함을 잃지않는「얼음토끼」

반데사르의 커리어의 시작은 골키퍼의 역할의 전환기와도 겹친다. 92년부터 골키퍼는 동료의 백패스를 손으로 처리할수없게되었다. 이 룰의 변경은 발기술이 좋은 골키퍼의 가치를 단숨에 높이게되었다. 그것은 크루이프가 예언했던것보다도 큰 변혁이었다. 반데사르는 그것 이외의 의미에서도 신세대 골키퍼의 이상형이라고 말할수있다. 그때까지 골키퍼는 세이브만으로 평가받아왔지만 그는 그렇지않았다. 그는 오히려 세이브를 하지않도록 노력했다.

최후미에서 수비진을 통솔하며 가능한한 자신이 직접 선방하는일이없을만한 상황을 만들어냈다. 골키퍼가 세이브를 한다라는것은 그 전단계에서 뭔가가 잘 되지않기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한 반데사르는 보다 주의깊게 경기의 흐름을 읽어내는데 신경썼다. 수비수를 잘 움직여서 본인은 최고의 포지션을 취하고 상대의 공격수가 정면으로 슛을 쏘게만들었다.

가치를 보여줬던것은 멋진 세이브가 아닌 세이브 자체를 하지않는것.
상대에게 슛을 쏘게하지못하도록 수비진을 조율하는법을 익혔다. 

실제로 경기의 관람객들은 반데사르에게는 거의 주목하지않았다. 눈길을 끄는 수퍼세이브가 다른 동업자들과 비교하면 적었던것이다. 따분한 골키퍼라고 말해도 좋을지도모른다. 하지만 그는 실점을 하지않는다. 그리고 세이브해야할때는 그의 임무를 확실히 완수해냈다. 다른 골키퍼가 반데사르에 대해 의견을 표출할때 반드시 도달하는 결론은「그는 거의 실수를 하지않는다」라는것이었다. 크루이프는「높은 레벨로 완성된 골키퍼」라고 평가했지만 크로스에 대한 대응, 아주가까운 거리에서의 슛에 대한 반응, 1대1 등 어떤 부분에 있어서도 결점은 보이지않았다.

골키퍼로서 이상적인 멘탈리티를 갖추기도했었다. 우리 네덜란드인은 반데사르를「ijskonijn」이라고 부른다.「얼음토끼」라고하는 의미다. 왠만해서는 감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지않으며 어떤 상황을 맞이하더라도 냉정함을 잃지않는다. 그는 좋든나쁘든「크레이지한 골키퍼」는 아니라는것이다.「평소에는 조용한 선수가 피치에서 매우 격해지는일이 있죠. 그들은 평소에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은 어른스러운 성격이다, 라고. 그런말을 저는 그대로 받아들였던적이 없어요」

반데사르는 감정을 컨트롤할수있다. 때로 전하기곤란한 작은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그의 피지컬능력도 근대 축구에 적합했다. 페널티에어리어안에서 크로스를 쳐내기위해 존재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잉글랜드적인 거한 골키퍼(데이빗 시먼처럼)는 90년대에 거의 소멸되었다. 오히려 잉글랜드에서조차 골키퍼에 대한 휘슬에 관용이 없어졌다. 상대의 공격수와 부딪히면 즉시 파울의 휘슬이 울린다. 신세대의 예의바른 축구에서는 시먼같은 골키퍼는 이제 불필요해져버린것이었다.

새로운 시대의 골키퍼는 반데사르처럼 큰 체조선수가 아니면 안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거의 같은세대의 탁월한 골키퍼이자 이탈리아대표의 지안루이지 부폰도 이런 타입이다. 반데사르는 어려서부터 성공을 거뒀지만 이것도 골키퍼로서는 이례적일것이다. 골키퍼란 연령과 함께 맛을 내는것이며 경험을 쌓은뒤에야 평가받는것이 일반적이었다. 24세때 네덜란드대표의 주전골키퍼가 되었고 같은해인 94-95시즌에 아약스에서 챔피언스리그를 제패했다. 덧붙여서 당시의 우승멤버중 반데사르를 포함한 5명 - 클라렌세 셰도르프(밀란), 은완코 카누(포츠머스), 야리 리트마넨(HK헬싱키), 에드가 다비즈(셰필드 윈즈데이)가 16년이 지난 지금도 현역생활을 계속해나가고있는것은 놀라운일이다.


이탈리아인이「파펠」이라고 부르는 평범한 실수를 반복했던「반데"골"」

99년 여름, 반데사르는 아약스에서 유벤투스로 이적한다. 암스테르담의 공항에서 토리노행 비행기편을 기다리고있을때 그의 휴대전화가 갑자기 울렸다. 전화를 걸었던것은 유나이티드의 알렉스 퍼거슨감독이었다. 이곳으로 오지않겠는가라는 퍼거슨의 요청에 대해 반데사르는「유감스럽지만 이미 유벤투스이적에 합의했기때문에」라며 거절했다. 이 결과 퍼거슨은 그뒤 신뢰할수있는 골키퍼를 계속 찾지않으면안되었던것이다. 전화가 하루 늦었던것을 아쉬워하면서.

유나이티드 입단은 2005년, 34세의 여름이었다.
퍼거슨감독에게 있어서는 6년만에 실현된 염원이었다.

아쉬웠던것은 반데사르도 마찬가지였을지도 모른다. 커리어속에서 최악이라고도 말할수있는 시기를 보냈던것이 유벤투스시절이었던것이다. 이탈리아인이「파펠」이라고 부르는 평범한 실수를 반복하며「반데"골"」이라고 조롱받았다. 골키퍼로서의 신뢰를 잃었던것은 이후에도 이전에도 이때뿐이었다고한다. 쫓기듯이 런던(풀햄)으로 보금자리를 찾아 떠났던것은 2001년의 일이었다.

같은해 9월 1일, 한층더 수렁에 빠졌던 반데사르를 더블린에서 눈으로 보게되었다. 네덜란드대표는 아일랜드대표에게 패배하며 2002년 월드컵출전권을 놓쳤던것이다. 경기후 그는 보기드물게 감정을 표출했다. 성큼성큼 걸어서 피치옆의 작은 테이블에 긴 다리를 올려놓고 그것을 차서 날려버리지않을까라고 생각했지만 올려져있던 작은 플라스틱컵만을 발로 차버렸다. 그것은「얼음토끼」가 커리어의 밑에서 보여줬던 화려한 발기술이었다.

전성기는 지나버린것처럼 생각되었다. 전 세계최고의 골키퍼는 그뒤 4년동안을 풀햄에서 보냈다. 당시 퍼거슨은 평범한 골키퍼로 만족하고있엇을것이다. 네덜란드에서는 골키퍼는 필드플레이어가 되지않으면안된다. 이탈리아에서는 완벽한 샷 스토퍼가 되기를 요구받았다. 반대로, 잉글랜드에서는 골키퍼에게는 그만큼 큰 역할이 요구되지않는다. 많은 감독이 골키퍼를 과소평가했고 그들의 가치를 올바르게 인식하지않았던것이다. 애당초, 골키퍼의 낮은 가치는 수치상으로도 증명되고있다. 이것은 분데스리가의 이야기지만 스포츠이코노미스트인 베른트 프릭이 리그 전체선수의 급여를 조사했을때 골키퍼는 그 외의 포지션에서 뛰고있는 선수와 비교해서 박봉이라는것이 판명되었다. 이적료도 낮다. 영국에서 골키퍼의 최고이적료는 2007년에 선더랜드가 크레익 고든을 영입하기위해 지불했던 9m파운드다(필드플레이어중 최고액은 이번 여름에 리버풀에서 첼시로 이적했던 페르난도 토레스의 50m파운드). 퍼거슨과 아르센 벵거같은 감독마저 골키퍼에게 큰 돈을 지불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던것이다.

큰 좌절을 맛봤던것은 유벤투스시절.
평범한 실수를 반복하며 반데"골"이라고 야유받았고 자신감을 잃어버렸다. 

2005년, 퍼거슨은 드디어 2m파운드를 지불하며 반데사르를 영입한다. 놀랐던것은 반데사르였다. 이미 34세. 주위뿐만아니라 본인도 이제부터 하향세에 들어갈것이라고 생각했기때문이다. 그리고 풀햄과의 계약이 끝나고나면 네덜란드로 돌아가서 북해 근처에 있는 고향의 아마추어클럽에서 축구를 즐길 생각이었던것이다. 포지션은 센터포워드.「골을 넣는것이 축구에서 가장 즐거운 부분이기때문에」. 당시의 그는 그렇게 말했다.


프리미어리그, 챔피언스리그, FA컵에서 우승했던 지금의 그에게 필요한것은 "주부"로서의 평범한 생활.

하지만 그때부터 반데사르는 두번째 전성기를 맞이한다. 프리미어리그 3연패를 이뤄냈고 2008년에는 모스크바땅에서 영웅이 되었다. 첼시와의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반데사르는 PK전에서는 그다지 좋은 추억이 없다. 네덜란드대표에서는 EURO96, EURO2000, 98년 프랑스월드컵까지 모두 PK전에서 패했다. 그가 좀 더 뛰어난 PK스토퍼였더라면 네덜란드는 그중 몇개의 대회를 제패했을것이다. 첼시는 PK전에서 반데사르의 벽을 간파하고있었다. PK에서는 오른쪽으로 점프한다. 사실 첼시의 선수는 6번째까지 모두가 반데사르의 왼쪽으로 찼고 5명이 성공시켰다. 7번째 키커로서 등장했던 니콜라 아넬카가 볼을 어루만지며 위치를 잡을때였다. 반데사르는 큰 글러브로 스스로 왼쪽을 가리켰고 이렇게 말했다.「너희들은 모두 이쪽으로 찰거야」. 아넬카는 얼어붙은것처럼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않았다. 그리고 마치 골프의 퍼팅처럼 약한 킥을 반데사르의 오른쪽으로 보냈던것이다. 오른쪽으로 점프했던 반데사르는 그순간 이미 웃고있었다.「결정적인 PK를 막아낼 기회는 앞으로도 찾아올것이다」. PK전에서 고배를 마실때마다 이렇게 말했던 반데사르. 그때가 드디어 찾아왔던것이다.

오른쪽으로 점프하며 아넬카의 PK를 선방.
약점이었던 "11미터의 공방전"을 드디어 제압했던것은 모스크바, 챔피언스리그 결승이었다. 

「누군나 스스로에게 의문을 갖게될것이다. 작가가 자신의 재능을 의심하는것처럼. 예술가 역시도 그렇다. 축구선수도 마찬가지. 그것이 성장을 촉구한다」 작가의 예를 들었던것은 로이 킨이 사라진뒤의 유나이티드에서 반데사르가 유일하게 독서라고하는 행위를 즐기는 사람이기때문일것이다. 30대 중반이 지나고나서 맞이한 두번째 전성기. 그것은 골키퍼의 커리어에 대한 관점을 바꿔놓는일이기도했었다. 축구에서 중요한것은「나이를 먹은 두뇌와 젊은 다리」이다. 특히 골키퍼에게 있어서는 그럴것이다. 과거 골키퍼코치로서 반데사르를 지도했던 욥 힐레는 이렇게 말했다.「골키핑이란 상황을 인식하고 그것을 이해해서 해결책을 발견하는 작업의 반복이다. 그것은 얼마나 반복하느냐에따라서는 간단히 할수있는것이된다」

경험이 쌓인 골키퍼는 언젠가 본적이 있는 정경을 인식해서 최선의 대응책을 이끌어낸다. 그것은 경험이 부족한 선수는 불가능한것이다. 젊은 그들에게 있는것은 재능뿐. 그리고 몇번의 실수를 범했을때 자신의 능력을 의심할것이다. 그것을 뛰어넘는자만이 일류 골키퍼가 될수있는것이다. 나이를 먹은 선수는 축구에 대해 뭔가 싫증을 낼수도있지만 반데사르에게는 적용되지않는것이다. 얼마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딸과 승리를 축하한 EURO2008에서의 한 장면.
8강에 그쳤던 이 대회가 대표로서의 마지막 무대였다. 

「지난시즌의 일이다. 그날은 기온이 4도전후였고 계속해서 비가 내렸다. 벤 포스터(당시 유나이티드의 백업 골키퍼. 현재 버밍엄 시티)가 이렇게 질문했다. 이런 날씨에도 아직 축구를 하고싶다고 생각하나요, 라고. 나는 이렇게 말했지. 물론. 나는 축구를 좋아하니까」. 그런 희망을 갖고있다면 다음시즌 이후에도 아직 현역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것이다. 하지만 2009년 크리스마스에 부인이 뇌출혈로 쓰러진일도 은퇴의 결단을 앞당기게되었다. 그녀는 회복했지만 네덜란드에서의 요양이 필요했다. 언제 은퇴를 결심했던것인가. 이 질문에 반데사르는 이렇게 답했다. 

「안마리가 쓰러졌을때부터 쭉 생각했었습니다」

프리미어리그, 챔피언스리그, FA컵에서 우승했던 지금의 그에게 필요한것은 "주부"로서의 평범한 생활인것이다. 어쨌든, 영원히 플레이할수있는 선수는 한명도 없다.「본인이 결단을 내린겁니다. 40대가 되어서도 수퍼맨일것이라는 견해는 무의미하니까」. 반데사르를 누구보다도 믿었던 남자, 퍼거슨은 그의 의사를 존중했다.

챔피언스리그우승, 프리미어리그 3연패, FA컵우승, 유나이티드에서는 두번째 전성기를 구가.
퍼디난드도 칭찬뿐이었다. 

본인의 의사를 존중하지않으려했던것은 웨인 루니였다. 곁에서 샤워를 하면서 은퇴를 재고해보라고 몇번이나 설득했다고한다. 유감스럽게도 효과는 없었다. 또한명의 팀메이트 리오 퍼디난드는 묵묵히 찬사를 보냈다.「반데사르는 제가 갖고있었던 키퍼관을 180도 뒤집었어요. 만약 제가 은퇴후에 감독이 된다면 그와같은 골키퍼를 영입할거에요」. 그렇게 생각하는것은 퍼디난드뿐만이 아니다. 축구는 앞으로도 반데사르와 같은 골키퍼를 요구할것이기때문이다.


출처 : 월드사커다이제스트 2011년 4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