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olumn/사이먼 쿠퍼 정기칼럼

사이몬 쿠퍼가 해부한 '메시란' - "소년의 창조력"이 낳은 아르헨티나 축구의 체현자


2관왕을 달성한 바르셀로나의 절대적인 에이스. 명실공히 최고봉에 군림하는 세계 No.1 선수.
모국에서 개최되는 코파아메리카에서 아르헨티나대표에서의 첫타이틀에 도전하는 리오넬 메시를 사이몬 쿠퍼가 해부합니다.

text by Simon KUPER
translation by Shin TOYOFUKU

저자 프로필

사이먼 쿠퍼 : 유럽을 대표하는 저술가. 영국경제잡지『파이낸셜 타임스』등에서 집필을 맡고있습니다. 스포츠를 인류학적 견지로 고찰하는 새로운 저널을 개척했고 1994년 축구의 이면을 다룬 획기적인 명저『축구의 적』을 상신. 윌리엄 힐이 주최한「Sportsbook of the Year」을 수상했습니다. 우간다출신의 잉글랜드인이며 네덜란드, 미국, 스웨덴, 자메이카에서 자라 잉글랜드와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세계적인 배경의 소유자입니다. 69년생.

그의 작은 신체는 피치위의 거인들을, 트레이닝을, 비웃는다.

5월 28일밤. 챔피언스리그결승에서 어느 장면이 기억에 남아있다. 하프웨이라인에서 볼을 받은 리오넬 메시가 드리블로 돌파하기시작.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선수를 한명, 또 한명씩 제치고 - 잊을수없는것은, 유나이티드는 세계에서 2번째로 강한팀이라는것이다 -, 오른쪽측면의 다비드 비야에게 패스. 그의 리턴패스는 몇센치차로 메시의 발에는 낳지못했지만 너무 선명했던 일련의 플레이는 마치 펠레와 디에고 마라도나의 그것같았다.

그런 메시는 지금까지 다양한 말로 형용되어왔다. '플레이스테이션 풋볼러'라고 칭했던것은 아스날의 아르센 벵거감독이다. ''우주에서온 선수'라는 표현도 있었지만 가장 와닿는것은 아르헨티나의 'P-BE(아이)'일것이다. 메시는 약관 13세로 고향 로사리오를 뒤로했지만 그리고나서 10년이상이 지났음에도 전형적인 아르헨티나축구선수인채로 남아있다.

메시의 Argentineness(아르헨티나인인것, 아르헨티나인스러움)은, 올해 7월에 한층더 명확해질것이다. 그는 10번을 등에달고 모국에서 처음으로 진검승부(코파 아메리카)에 도전한다. 아르헨티나국민은 이 작은 P-BE가 바르셀로나에서 보여준것같은 플레이를 자신들의 앞에서 보여주길 원하고있다. 이것은 2000년부터, 지금부터 11년이나 전의 일이기도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만났던 아르헨티나인의 사회학자, 에두아르도 알케티는 P-BE에 대해 이렇게 말해줬다.

말하길, P-BE란 1920년대부터 아르헨티나 축구팬의 머리속에 있었던 개념같은것이라고한다. P-BE는 길거리의 빈곤한 지역에서 축구에 빠진 소년들. 황무지에서의 축구. 그곳에서는 드리블을 잘하는 소년이야말로 왕이다. P-BE는 언제나 독창적이고 그런 P-BE의 축구를 아르헨티나인들은 'la nuestra(우리의 것)'이라고 부른다. 아르헨티나축구란 그런 길가의 소년들의 창조력이 낳은것이었다.

1928년, 저널리스트 볼로콧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축구잡지 '엘 그라피코'에서 이런 제안을했다. 드리블의 발명자인 P-BE의 이미지를 동상으로 만들어서 모든 길모퉁이에 설치합시다, 라고. 볼로콧은 이렇게 표현했다. "더러운 얼굴의 아이들. 그 풍성한 머리는 거꾸로 서있고, 지적이지는않지만 눈빛은 마치 악한의 조소를 연상시킨다. 그들의 입에는 어제의 빵을 갉아먹어 줄어든 작은 이" 1943년에 만들어진 '소년의 꿈'이라는 탱고는 P-BE에 대해 노래한것이다. 마라도나가 팬들앞에서 보여줬던것도 그 노래속에서 P-BE는 이런풍으로 그려지고있다.

"사랑하는 어머니, 언젠가 저는 돈을 벌거에요. 발도네드와 마르티노, 그리고 보제같은 선수가 될거에요". 노래는 P-BE의 꿈으로 끝난다. '남은 시간은 앞으로 1분. 스코어는 0-0. 그는 볼을 잡는다. 차분하게 전진하면서 적을 모두 제치며 골키퍼까지 일직선. 그의 강력한 일격으로 그는 경기를 결정지었다.'

마치 마라도나의 5인돌파골을 예언하는것같은 노래다. 혹은, 마이클 오웬이 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넣었던 충격적인 골 - 당시 아르헨티나에는 '잉글랜드는 P-BE를 찾아냈다'라며 슬프게 보도되었다 -과 그후 메시의 많은 골을 노래한것이기도하다.

'아르헨티나에 마라도나라고하는 선수가 있던것, 그것이 문제다. 우리는 언제나 새로운 마라도나를 계속해서 기다리게될것이다.' 그것은 바보같은 기대라는것을 머리속으로는 이해하고있어도 누구나 새로운 마라도나를 계속해서 기다려왔다. 아르헨티나의 저명한 만화가이자 소설가, 로사리오의 열렬한 팬이기도한 로베르토 '엘 네그로' 폰타나로사도 똑같이 생각했다. 그는 언젠가 내게 이렇게 말해줬던적이있다.

"마라도나가 벨기에에서 태어나는일은 없을거에요." 그 회화속에서 추가로 그는 "아르헨티나의 영웅은 대개 일찍죽게되죠."라고도 말했었지만 뜻밖에도 그것은 폰타나로사자신, 그리고 아르케티의 몸에 일어나버렸다. 아르케티는 2005년 6월, 암때문에 이 세상을 떠났다. 그것은 메시가 네덜란드에서 월드유스(21세이하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를 우승이로 이끌기 4주전의 사건이었다.

2007년에 62세로 사망했던 폰타나로사는 적어도 아르케티보다는 메시의 플레이를 만끽할수있는 은혜를 얻었다. 그는 한눈에 확신했을것이다. 새로운 P-BE의 탄생을. 그리고 메시는 지금도 '아이'인채로 남아있다. 외견에 구애받지않고 정원수같은 그의 머리는 뭔가 대회에서 승리한뒤 '바르샤에서 하루를 보낼 권리'를 얻어낸 소년같았다.

예리한 스텝과 가벼운 몸을 활용해서 강력한 수비수들을 희롱.
작은 신체를 오히려 무기로 삼은 메시는 세계최고가 되었다.

어느 이벤트의 한장면. 어린팬들과 만난 메시의 모습(오른쪽)은 확실히 소년 그 자체다.
꾸밈없는 모습이 여기서 자연스럽게 나타났다. 

그의 작은 신체는 피치위의 거인들을, 트레이닝을, 스포츠계에 만연하는 서플리멘트를, 비웃는다. 메시는 볼을 받아서 달린다. 그의 모습은 마치 애견과 놀고있는 소년같기도하다. 일반적인 선수의 4분의 3정도은 직선스탭을 날카롭게 연마해서 어떤 상대보다도 빠르게 방향전환을 해낸다. "아이"이기때문에 주위의 거인들에게는 없는 발군의 밸런스를 그만이 갖고있다. 그것은 그의 최대무기이기도하다. 메시의 특징은 세컨볼을 탈취하는 능력에도 있을것이다. 태클을 당해서 컨트롤을 잃더라도 즉시 자세를 고쳐세워서 볼을 빼앗아버린다. 비틀거리는 수비수를 거들떠보지도않고 다시 드리블을 시작하는것이다.

마라도나와 함께 86년 멕시코월드컵을 제패했던 호르페 발다노는 이렇게 말했다. "메시는 아르헨티나축구의 꿈, 혹은 이상을 구현화해낸 상징적인 존재다."


마시아는 '제2의 마라도나'가 될 위험에서 메시를 지켜냈다.

메시는 P-BE이상의 존재이기도할것이다. 전형적인 아르헨티나인축구선수지만 그의 성공은 빠르게 모국을 떠난것에있기때문이다. 그가 13세때 아르헨티나를 뒤로했던것은 지극히 "P-BE"적인 육체였기때문이다. 성장호르몬의 분비이상으로 신체는 13세때 140cm밖에되지않았고 인근의 9세 어린이보다도 작았다. 호르몬투여등의 치료가 필요하다고 진단받았고 그것을 위한 비용은 월 900달러라고 선고받았다. 이것은 당시 아르헨티나인 평균월급과 비슷한 금액이었다.

철강노동자인 아버지는 아들이 소속되어있었던 뉴웰스 올드보이즈에 원조를 요구했지만 재정이 좋지않았던 클럽은 이 말라깽이 소년에게 비용을 나눠주는것을 거부했다. 메시의 커리어를 구해줬던것은 스페인 카탈루냐지방에 있었던 일가 친숙이었다. 종형제가 바르셀로나에 추천하며 입단테스트를 받았던 메시는 거기서 5골을 넣었던것이다. 바르샤는 치료비를 부담할것을 약속했고 이렇게해서 메시는 가족과 함께 로사리오를 뒤로하게되었던것이다. 당시 일가는 바르셀로나가 해안에 인접한 도시라는것도 알지못했다고한다. 메시는 매일밤 다리에 호르몬주사를 맞았다. 그 효과덕분에 벤치에 앉으면 대롱대롱 공중에 떠닜던 발도 확실히 땅에 안착하게되었고 프로축구선수로서 해나갈수있을정도의 신장을 손에 넣었던것이다.

가족처럼 소년들을 포용하고 인간으로서 훌륭하게 육성시키는 바르샤.
얼마전 이전하기까지 메시는 이곳 마시아의 식당에 자주 모습을 나타냈다. 

입단했던것이 이 지구상에서 가장 뛰어난 젊은선수육성시스템을 가진 바르샤였던것은 선수로서 성장하는데도 큰 행운이었다. 바르샤가 아니었다면 메시라고하는 세계최고의 선수는 태어나지못했을것이다. 마시아(유스팀의 기숙사)는 모든 의미에서 '제2의 마라도나'가 될 위험에서 메시를 지켜냈다. 현역시절의 마라도나는 당시 축구선수가 그랬던것처럼 마치 락스타같은 생활을 보냈다. 바르셀로나는 이 마라도나와 훗날 호나우지뉴를 나쁜 전례로 만든, 그 교훈을 활용했다.

마라도나도 호나우지뉴도, 스스로 타락한 파티라이프로 몸을 망쳤고 마지막은 쫓겨나듯이 바르샤를 떠났다. 이 둘을 반면교사로 삼아 클럽은 메시를 비호했던것이다. 메시에게도 유혹은 찾아왔었다. 바르샤의 톱팀에 승격하고나서의 일, 호나우지뉴를 중심으로한 그룹이 끈임없이 메시를 밤거리로 유혹했다. 하지만 당시 바르샤B의 감독이었던 펩 과르디올라는 메시에게 이렇게 말했다고한다. "너에게는 두가지 선택지가있다. 파티를 계속하며 이곳을 떠날것인가. 그렇지않다면 올바른 식생활을 계속하며 술에는 손도대지않고 밤에는 빠르게 침대에 들어가서 지각하지않고 연습에 참가해서 세계최고의 선수가될것인가. 네게는 그 재능이 있다."

바르샤는 '가족'으로서 메시를 키워냈다. 마시아에서 소년들의 상담역을 맡고있는 알베르 카펠라스는 말했다. "메시도 이니에스타도, 이제 이곳에서 독립해서 홀로선 선수입니다. 하지만 미사아는 언제든 그들이 돌아올수있는 장소입니다. 지금도 이곳에서 식사를 할때가있고 뭔가 문제가 있으면 이곳으로 찾아옵니다. 마치 부모에게 상담하는것처럼말이죠. 우리들에게 있어서 그들은 스타가 아닙니다. 지금도 레오이고 안드레스인것입니다. 평소 이렇게 말하고있죠. 너희들은 훌륭한 인간이다. 그 가치를 잃지말아라,라고."

피치위에서도 바르샤는 P-BE를 훌륭한 청년으로 키워냈다. 메시를 데뷔시켰던 프랑크 라이카르트 전 감독은 내게 이렇게 말해준적이있다. 2008년이다. "메시 대 11명, 같은 경기가 몇번이나 있었죠. 그는 꺾였고, 승리하더라도 1-0의 신승. 0-0으로 끝나거나 혹은 0-1로 패배한적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훌륭한 드리블러에 불과했던 메시가 크게 성장할수있었던것은 플레이의 폭을 넓혔기때문이에요. 드리블 일변도가아닌 그곳에서 패스를 주고받습니다. 개인플레이를 줄이고 그는 효율성을 손에 넣었어요." P-BE는 그렇게해서 '유럽인'이 되었다고도 말할수있다. 그거슨 마라도나가 얻지못했던, 혹은 얻으려고하지않았던 감각이었다.


아르헨티나대표에서는 마치 마법이 풀리기라도한것처럼 침묵한다...

하지만, 아르헨티나인들은 이렇게 묻는다. 왜, 아르헨티나대표의 메시는 바르샤의 메시가 아닌걸까. 바르샤의 유니폼을 입은 메시는 누구에게도 저지당하지않지만 아르헨티나에서는 그렇지않다. 마치 마법이 풀려버리기라도한것처럼 침묵한다.

남아공월드컵의 아르헨티나대표는 '백설공주와 일곱난장이들'같은 팀이었다. 1m69cm의 메시, 1m70cm의 카를로스 테베즈, 1m75cm의 세르히오 아구에로, 1m65cm의 마라도나가 이끌었다. 하지만 메시는 바르샤에서 보여줬던것같은 광채를 발휘하지는못했다. 과르디올라는 바르샤에서, 메시를 '허구의 9번'으로 기용했다. "레오, 나는 너를 페널티에어리어에 보다 가까운 장소에서 플레이하게할것이다." 감독은 그렇게 말하며 메시의 포지션을 윙에서 중앙으로 이동시켰다.

하지만 아르헨티나대표를 이끌었던 마라도나는 그렇게하지않았다. 그는 남아공에서 메시를 팀의 '지배자', 즉 고전적인 '10번'으로서 기용했던것이다. 과르디올라가 '골 근처'에서 그의 재능을 이끌어냈던것에반해 마라도나는 '볼 근처'에서 플레이하는것을 요구했던것이다. '지배자'로서 메시는 여러차례 중반의 깊숙한 위치까지 내려와서 볼을 잡았다. 결승토너먼트 1라운드 멕시코전, 이어진 준준결승 독일전에서는 볼을 받은순간 그의 눈앞에는 적이 6명에서 7명정도있는 장면이 있었다. 언제나 마라도나의 '5인돌파'가 요구되는듯한 상황이었지만 현대축구에서는 아무리 메시같은 스타급 재능이더라도 그것은 무리한 주문이다.

독일에게 참패(0-4)하며 8강탈락이 확정되자 메시에게는 비판이 쏟아져나왔다. "녀석은 아르헨티나인이 아니다." 그런 목소리도 있었다. 스페인의 유스대표에 소집되었던 경험도 있지만 그것을 확실히 거절했던 메시는 "녀석은 아르헨티나인이 아니라고하는 비판이 무엇보다 나를 초조하게만든다. 아무것도 알지못하는주제에."라며 분노를 표출했던적도있다.

바르샤에서 대표의 유니폼으로 갈아입더라도 변함없이 광채를 발휘할수있을것인가.
모국에서 열리는 코파 아메리카. 메시에게 있어서는 큰 도전이 될것이다. 

그리고, 2011년 7월이 다가왔다. 모국에서 열리는 코파 아메리카. 아르헨티나는 93년에 이 대회에서 우승한것을 마지막으로 국제타이틀에서 멀어져갔다. 아르헨티나대표를 이끄는 세르히오 바티스타가 조세 무리뉴같은 전술가가 아니라는것은 누구나 알고있다. 옥신각신한끝에 남아공월드컵 이후 사실상 해임된 마라도나의 뒤를 이것도 여러차례 바뀐끝에 물려받은 바티스타에게 있어서 이것이 첫 공식전이 될것이다.

불안은 끝이없지만 그럼에도 긍정적인 요소는 있다. 그것은 메시와 바티스타가 양호한 관계를 쌓고있다는것. 감독과 선수로서 함께 베이징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 A대표에서 재회하고나서도 친선경기이긴하지만 스페인에게 4-1, 브라질에게 1-0으로 승리했다. 무엇보다 바티스타는 '메시를 위한 시스템', 즉 아르헨티나판 바르샤를 구축하려하고있다. 바르샤류의 4-3-3시스템을 바티스타는 코파에 사용할 의향이다. 그리고 바르샤처럼 메시를 '허구의 9번'으로서 플레이하게할것이다. '진짜 9번'인 곤살로 이과인은 벤치에 앉히고 테베즈도 그렇게될것이다.

메시는 시대를 상징하는, 최고의 선수이다. 과거 펠레와 마라도나가 그랬던것처럼. 하지만 수십년뒤의 미래에도 펠레와 마라도나와 같은선상에서 언급되기위해서는 대표에서 타이틀을 얻어낼 필요가 있다. 2011년 7월. 그것은 'P-BE'메시에게 있어서 최대의 기회, 최대의 도전이 될것이다.


출처 : 월드사커다이제스트 2011년 7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