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에 걸쳐, 세리에A와 이탈리아대표의 간판공격수로 활약했던 크리스티안 비에리가 유니폼을 벗은것은 2009년 10월.
20년의 축구인생동안 수많은 골과 로망스를 가져다줬던 "중전차"(비에리의 애칭)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봅니다.
Text by Frank DUNNE
2009년 10월, 인테르와 이탈리아대표의 간판공격수로 오랜기간에 걸쳐 활약했던 크리스티안 "보보" 비에리는 현역은퇴를 발표했다. 그리고나서 1개월뒤 여자친구 멜리사 사타와 브라질의 피치에서 편하게 쉬고있는 그의 모습이 목격되었다. 그 시점에서 그는 압박에서 해방된 새로운 삶을 확립한것인가라고도 생각되었다. 하지만 실제는 달랐다. 파파라치의 집요한 추적을 빠져나가면서 브라질의 3부리그에 소속된 보아비스타에서의 현역복귀를 획책했던것이다.
비에리는 2006년 여름에도 한번 현역은퇴를 발표했던적이 있다. 삼프도리아와의 계약서에 사인을 마치고 자랑스럽게 32번 유니폼을 보도진에게 선보이고난뒤 몇주뒤의 일이었다. 이탈리아대표가 프랑스와 맞붙었던 독일월드컵 결승전 전날, 7월 8일에 현역은퇴를 발표한것이다. 월드컵에 임하는 이탈리아대표멤버에 소집되지못한것에 낙담했다는 이유였다.
원래대로라면 비에리는 독일월드컵에 참가했어야했을것이다. 하지만 무릎에 부상을 안고있던 그를 마르첼로 리피감독은 대표멤버에서 제외시켰다. 비에리는 말했다.「저는 쭉 이탈리아대표의 일원이었습니다. U-21부터 쭉 대표에서 플레이해왔죠. 그때의 팀이라면 월드컵에서 우승할수있을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대표에 소집되지못한것을 알게되고나서 2~3개월이나 화가 가라앉지않았어요. 축구를 보고싶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축구에 관한 이야기도 하고싶지않았습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의 능력에 그림자가 생기기시작했던것은 부정할수없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축구선수로서의 빛나는 커리어를 가릴수는없다. 비에리는 틀림없이 이탈리아축구계가 최근 50년동안 배출했던 최고의 센터포워드중 한명일것이기때문이다.
비에리는 이탈리아대표로서 49경기에 출전해서 23골을 기록. 특필해야하는것은 인테르에서 플레이했던 6시즌동안 143경기에 출전해서 103골을 넣었다라는것이다. 추가로, 스페인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 소속되어있었던 1997-98시즌에는 24경기에 출전해서 24골이라는 터무니없는 득점력을 발휘했다. 그는 그의 커리어에서 스쿠데토와 인터콘티넨탈컵(도요타컵), 유럽수퍼컵, 컵위너스컵, 코파이탈리아를 각각 1번씩 획득, 추가로 세리에A 연간최우수선수로 2번 선출되었다.
그는 어디에서든 골을 넣을수있는 센터포워드였다. 강력한 왼발슛과 에어리어바깥에서 절묘한 루프슛, 아크로바틱한 발리 등 확실히 "골넣는기계"라고 말할수있는 스트라이커였다. 비에리는 왜 골을 양산할수있었을까. 그것에는 2가지 이유가 생각난다. 우선은 상반신의 경이적인 파워를 거론할 수 있다. 그는 그 파워를 최대한으로 이용해서 강력한 수비수들을 "튕겨내고"슛을 쐈던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슛으로 이어지는 스피드다. 그는 원터치나 투터치로 슛을 쐈다. 즉, 상대 골키퍼의 준비가 완료되지않은사이에 슛을 쐈다는것이다. 이유는 2가지로 말했지만 강력한 헤딩을 들지않을수없을것이다. 볼을 루프로 띄워서 상대 골키퍼의 배후를 돌파하는모습까지 다양한 패턴의 헤딩슛을 날리는것도 가능했다. 확실히 헤딩의 천재였다고 말할수있을것이다.
누구나 인정하는 비에리의 베스트골은 99년 9월 파르마전에서 넣었던것일것이다. 페널티에어리어안에서 상대 수비수를 등지고 패스를 받은뒤 그것을 힐로 "플릭-온"(머리와 발로 볼을 띄워서 다이렉트로 후방으로 볼을 보내는 테크닉). 그대로 왼발로 파포스트를 노리고 감아차듯이 골왼쪽모서리로 볼을 차넣었다. 그순간 파르마의 알베르토 말레자니감독은「믿을수없어!」라며 손으로 머리를 감쌌고 귀빈석에 있던 인테르의 마시모 모라티회장은 비에리를 영입하기위해 이탈리아사상최고액수의 이적료인 900억리라를 지불했던것에 납득이 갔을것이다.
만약 경기에서 승리하고싶다면 나를 공격수로 기용하는쪽이 낫다.
비에리의 이탈리아축구계 데뷔는 화려함과는 전혀 무관한것이었다. 젊었을때부터 그의 재능은 높게 평가받았지만 오랜 밑바닥생활을 강요받았다. 그가 이탈리아에서의 커리어를 시작했던것은 토스카나주의 아마추어클럽 산타 루치아였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산타 루치아에서는 급료를 받지못했어요. 그래서 할아버지가 내게 보상금을 줬죠. 할아버지는 내가 골을 넣을때마다 5000리라를 주기로 약속했었습니다. 나는 첫 경기에서 4골이나 넣었기때문에 2만리라가 수입이 되었죠. 그 이후에도 골을 양산했었습니다. 역시 할아버지도 곤란했던것일까, 도중에 1골당 1000리라라고하는 조건으로 바꾸더라구요(웃음)」
크리스티안 비에리는 1973년 7월 12일에 볼로냐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로베르토 비에리도 유명한 축구선수였다. 아버지 로베르토는 삼프도리아, 로마, 볼로냐, 유벤투스, 피오렌티나에서 플레이한뒤 아들 크리스티안이 4살일때 가족을 데리고 호주로 이사해서 시드니의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만든 축구팀 말코니 스탈리온스에서 플레이. 크리스티안은 당초 크리켓을 좋아했었다고. 하지만 피는 속일수없다. 그는 즉시 말코니 스탈리온스의 주니어팀에 입단한다. 크리스티안에게 처음으로 부여된 포지션은 왼쪽 측면수비수였다.「4,5개월정도 지났을때는 저는 팀의 공격수들보다 많은 골을 넣게되었죠. 그래서 감독에게 말했어요.『만약 경기에서 승리하고싶다면 나를 공격수로 기용하는쪽이 낫다』라고. 그 이후 저는 계속해서 공격수로 플레이하게되었죠」
호주에서 자랐던것이 그의 성격형성과 인생철학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는것은 말할것까지도없다. 그런 그가 태어난 고향인 이탈리아에서 아웃사이더로 비춰지는것은 불가피했을것이다.「저는 호주에서 자랐습니다. 호주는 자유로운 나라. 매일 스케이트보드나 BMX로 통학했었죠. 아침부터 저녁까지 짧은바지와 비치샌들을 신고 한가한 시간에는 크리켓을 하면서 놀았어요. 생각했던것도 확실히 말했었죠. 물론 호주사람 모두가 그랬었다고 말할뿐. 하지만 이탈리아에서는 그렇지않은것같더군요. 연로한 저널리스트는『우리들의 책임으로 이런 젊은이가 태어나버렸다』라고 한탄하는것같은데 내가 이런 성격인것은 그들의 책임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비에리와 미디어의 사이에는 언제나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의 미디어불신은 날이 거듭될수록 높아져갔다는것. 그리고, EURO2004에서 그 불신이 폭발했다. 그의 분노는 50명의 이탈리아인 보도진을 앞에둔 기자회견장에서 폭발했다. 이탈리아는 기자회견 전날밤 스웨덴전에서 코너킥 상황에서 흘러나온볼이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의 발리힐 루프슛이라는 아크로바틱한 골로 뼈아픈 패배를 당했다. 페널티에어리어안에서 수비를 하던 비에리의 머리위를 지나 볼로 뛰어들었던 지안루이지 부폰도 간단하게 놓치며 득점을 허용했다. 당연히 이탈리아의 미디어는 2명의 플레이에 비판을 퍼부었다. 스웨덴전 다음날, 비에리는 신문으로 눈을 돌렸고 그곳에는「비에리와 부폰은 경기후 술을 마시며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경기에서 패배한 직후에 술을 마시고 떠들다니 인간실격이다」라고 써져있었다. 이런 경위에서 비에리는 기자회견에서 보도진을 물어뜯었다.「나와 지지는 절친한 친구기때문에 경기후 둘이서 저녁식사를 함께했던것은 사실이다. "조용한" 저녁식사였다. 축구선수로서의 나를 비판하는것은 상관없다. 하지만 당신들에게 인간으로서의 나를 비판할 권리는 없다. 내가 어떤 인간인지는 나 자신이 가장 잘 알고있다. 나는 스스로를 매일 거울로 보고있기때문이다. 그건 당신들에게는 불가능한것이 아닌가?」
나는 인테르에 모든것을 바쳤다. 인테르는 내 인생 그 자체였다.
비에리는 14세때 큰 꿈을 안고 토스카나주에 왔다. 호주에서는 TV로 세리에A의 경기를 자주 봤다고한다. 그의 마음에 들었던 팀은 삼프도리아였다. 로베르토 만치니와 지안루카 비알리가 활약했던시대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서 축구선수가 되고싶다라는 어린 크리스티안의 꿈에 과거 세리에A에서 플레이했던적도 있는 아버리 로베르토는 의외로 찬성하지않았다고한다. 그럼에도 크리스티안의 결의는 확고했다.「만치니와 비알리는 제 동경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날 아버지에게 말했었죠.『나는 이탈리아에서 축구선수가될거야』라고. 아버지에게서는『바보같은소리하지마』라고 꾸중을 들었지만 전 그 반대를 무시했었죠. 그리고 이탈리아행 비행기에 올라타게되었습니다」
보보는 토스카나에 사는 할아버지의 집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89년에 프라토의 프리마베라에서 플레이했고, 이듬해인 90년에 세리에A의 토리노로 이적했다. 당시 토리노의 감독 에밀리아노 몬도니코에게 있어 비에리의 높은 잠재능력은 놀라움의 대상이었고 다이아몬트의 원석을 발견한듯한 기분이 들었다고한다. 몬도니코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비에리는 처음에는 프리마베라에서 플레이했었다. 그때부터 그의 플레이를 보기위해 많은 티포지가 스타디오 필라델피아에 오기시작했지. 당시에는 플레이에 투박함이 눈에 띄었지만 강력한 슛으로 주위를 압도했다. 기술적임 면에서는 아직 부족한점이 있었지만 투쟁심이 다른사람의 두배는 되었던것같다. 그렇기때문에 나는 그를 곧바로 톱팀으로 승격시켰다」
토리노에서 2시즌 반정도 플레이한뒤 비에리는 유랑여행을 떠났다. 피사, 라벤나, 베네치아, 아탈란타에서 각각 1시즌씩 플에한뒤 96년 여름에 그에게 있어서는 첫 빅클럽, 유베에 입단했다. 하지만 유베에서도 느긋하게 자리잡지못했고 1시즌간 플레이한뒤 이번에는 바다를 건너 스페인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구하게되었다. 마드리드에 본거지를 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이적한 비에리는 그의 스트라이커로서의 높은 재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게된다. 하지만 동시에 유혹으로 가득찬 마드리드의 밤문화가 그의 마음을 끌어당겼던것도 확실하다. 보보는 마드리드의 디스코에 폐점시간까지 남아있는 남자로 유명해졌다.
「마드리드에서는 10명에서 15명의 팀메이트와 함께 거의 매일밤 디스코에 갔습니다. 하지만 프런트에서 주의받은적은 한번도 없었고 감독에게도 다른 누구에게도 듣지못했습니다. 그때 제가 1경기 평균 1골을 넣고있었기때문일겁니다. 리가 에스파뇰라의 득점왕경쟁에서 선두에 서있었죠. 스페인은 모든것이 달랐습니다. 주위에서의 압박도 이탈리아와 비교하면 0에 가까운것이었죠. 트레이닝때도 하프사이즈의 미니게임과 슛연습정도. 어린이가 하는듯한 축구를 하고있는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사키가 감독으로 취임했을때 모든것이 달라졌어요. 토레이닝에 전술연습이 도입되었고 볼포제션이 중시되었으며 피지컬트레이닝도 늘어났습니다. 팀메이트는 모두 내게 잔소리를 늘어놨었죠.『내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 사키를 데려왔다』라고 생각하는것같았습니다」
타협을 허용하지않는 성격과 방랑벽이 있었기때문에 보보는 하나의 팀에 장기간 정착할수없었다고 말해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인테르에서 예상이상으로 오랜기간 플레이하게된다. 많은 사람들이,「이것으로 비에리의 여행은 끝났다」라고 생각했을것이다. 그는 인테르에서 99-00시즌부터 6시즌동안 플레이했다. 비에리는 인테르에서도 골을 양산했고 "페노메노" 호나우두와의 꿈의 2톱도 큰 화제를 불러왔다. 하지만 함께 부상으로 전선에서 이탈하는것을 반복하며 그들 2명이 피치에서 동시에 빛을 발했던것은 거의 없었다. 그들의 파트너쉽은 오히려 피치바깥에서 화제를 불러왔다.
99년 11월 TV 토크쇼에 출연했던 비에리는 호나우두와의 친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호나우두는 아마 가장 연습을 하지않는 선수일거에요. 그는 세계최고의 선수이기때문에 연습할필요가 없겠죠. 저는 그와 매일밤 놀러나갔습니다. 클럽과 디스코에서 놀고 집에 돌아오는것은 아침 5시나 6시쯤이었어요. 그리고나서 저는 연습하러가기전에 2시간정도 잠을 자지만 로니는 잠을 자지않는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클럽하우스의 소파에 앉아서 카푸치노를 마시며 크로아상을 먹었기때문이죠. 그리고 밤이 되면 또 모습을 나타냅니다. 제 집앞에 차를 세우고 클랙션을 울리죠. 내가 나올때까지 계속 울리는거에요! 그렇게해서 우리들은 밤거리로 다시 나가게됩니다」
밀라노에서의 밤문화로 비에리는 서서히 좋지않은 소문이 흘렀다. 그와 쇼걸의 투샷은 가쉽지의 각 호에 장식되었다. 모라티회장이 비에리의 밤놀이를 흔쾌히 생각하지않았던것은 확실하다. 비에리의 가쉽기사가 잡지에 게재될때마다 보보와 모라티회장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비에리의 사생활의 혼란을 신경쓰던 모라티회장은『TELECOM ITALIA』사의 임원에게 부탁해서 2002년부터 2004년에 걸쳐 보보의 전화를 도청했다라는 의혹이 생겨날정도였다.
2005년 여름에 인테르가 비에리 방출을 결단했던때는 자신의 전화가 도청당했다는것을 알아채지못한듯했다. 그는 인테르의 결단은 어디까지나 전력평가상의 일이라고 믿었다.「나는 인테르에 모든것을 바쳤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인테르에 모든것을 바쳤다고 생각한다. 인테르는 내 인생 그 자체였다. 나는 인테르를 사랑하지만 클럽은 계약을 파기하려고했다『당신은 인테르 그 자체다』라고 말해준 직후에 나를 해고했다」
2006년 9월에 발표된『TELECOM ITALIA』사의 도청스캔들로 유명인사, 정치가, 대기업의 오너 등의 이름에 섞여서 크리스티안 비에리의 이름이 나왔을때 그는 꽤 동요했다고 말했다. 분한 나머지 우울증과 불면증에 걸렸다고 현재 비에리의 여자친구인 사타는 증언했다. 비에리는 현재 과거의 사건으로 거슬러올라가서 인테르측에 8m유로,『TELECOM ITALIA』사에 11m유로의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걸었다.
아주리의 스트라이커로서 비에리는 역사에 그의 이름을 새겼다.
비에리와 인테르의 관계는 최종적으로는 증오로 가득찬것이 되었다. 하지만 인테르가 축구선수로서의 비에리에게 있어 최고의 환경이었던것은 분명하다. 다음 직장이 되었던 밀란과 모나코는 그에게 있어 굴욕의 장소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누구도 이해하기어려운 삼프도리아와의 계약.... 그가 어렸을때 동경했던 삼프도리아에서의 생활은 시작도전에 끝나버린듯한것이었다. 2006년 여름, 세간은 칼치오폴리로 들썩였다. 비에리는「세리에B 강등을 선고받은 유베에서 플레이하더라도 상관없다」라며 10년전의 친정팀에 스스로를 팔았다고한다. 하지만 유베가 그의 오퍼를 받아들이는일은 없었다. 갈곳을 잏은 비에리는 서바이벌프로그램『L'isola dei famosi』(유명인의 섬)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할것이라는 소문으로 화제를 불러온뒤 돌연 아탈란타입단을 발표하게되었다.
아탈란타에서는 시에나전에서 센터서클부근에서 롱슛을 넣었고 이전같은 박력과 결정력을 보여주는 장면도 있었지만 결국 7경기에 출전해서 2골이라는 성적을 남겼다. 그리고 아탈란타도 겨우 1시즌만에 뒤로했다. 2007년 여름, 피오렌티나의 판탈레오 코르비노GM은 비에리를 영입하도록 델라발레회장을 설득. 비올라에 입단했을때 비에리는 이미 34세가 되어있었다. 비올라의 블로그와 공식사이트는 보보가 연봉 120만유로로 플레이하는것에 반대하는 게시글로 메워지게되었다. 하지만 비올라에서의 비에리는 캄피오나토와 UEFA컵에서 귀중한 골을 기록, 입단한지 3개월만에 티포지의 신뢰를 손에 넣었다. 파비오 카펠로가「비에리를 이탈리아대표로 복귀시켜야한다」라는 코멘트를 남기는등, 보보의 플레이는 주변을 매료시켰던것이다.
비에리의 축구인생은 다시 "장밋빛"이 되는듯했다. 그와 보스턴 출신의 여자친구인 사타는 프라토교외의 농가를 사들여 이사했고 개, 집오리, 칠면조, 공작으로 둘러싸인 목가적인 생활을 즐겼다고한다. 비에리는 연습장까지 전철로 다녔고 보통 노동자로서의 생활을 만끽했다. 하지만 그의 "피렌체 르네상스"는 오래가지못했다. 시즌중반부터 플레이에 노쇠화를 보이기 시작했던 비에리에대해 비올라가 새로운 계약을 제시하지않았던것이다. 2008년 여름 그는 3번 아탈란타의 유니폼을 입게되었고 1년간의 계약으로 플레이. 2008-09시즌은 9경기출전 2골을 기록하는데 그쳤다. 그리고 시즌종료후 현역은퇴를 발표했던것이다.
그는 또 아주리의 스트라이커로서 이탈리아대표의 역사에 그의 이름을 새겼다. 96-97시즌, 유베에서의 활약이 그를 대표로 이끌었다. 당시 이탈리아대표감독 체사레 말디니는 비에리를 소집하지않을수없었다고 말할수있을것이다. 그정도의 강력함과 결정력을 갖췄던것이다. 비에리는 말디니감독의 기대를 배신한적이 없었다. 97년 3월 대표데뷔전이 되었던 몰도바전에서 골을 넣으며 3-0의 승리에 공헌했고 그 이후에도 2경기에 1골이라는 비율로 골을 양산. 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는 5골,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는 4골을 기록했다. 덧붙여서 월드컵통산 9골은 이탈리아인으로서는 파올로 로시, 로베르토 바죠와 어깨를 나란히하는 역대최다득점기록이다. 또, 아주리에서는 49경기출장 23골을 기록했고 이탈리아대표의 역대득점랭킹에서도 9위에 랭크되어있다. 부상을 원인으로 기록을 늘리지못했던것은 유감스럽다고밖에 말할수없다.
그는 부상으로인해 2006 독일월드컵 출전을 놓쳤다. 리피감독은 알베르토 질라르디노나 루카 토니같은 센터포워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베와 인테르에서 그의 지휘아래 플레이했던 폭탄에게 큰 신뢰를 불어넣었다. 감독은 독일으로 데려가고싶었기때문에 2006년 1월에 밀란에서 출전기회를 잃었던 비에리에게 모나코이적을 권유했다. 비에리가 모나코에서 경기에 출전하는것으로 아주리로 가는 길이 열릴거라고 리피는 생각했을것이다. 비에리는 리피의 기대대로 모나코의 피치에 섰고 7경기에서 3골을 기록했다. 그상태로 나아간다면 아주리에 복귀할것이라고 누구나 생각하던대 불행이 일어났다. 2006년 3월에 무릎인대 부상을 당해버린것이다. 이 부상으로 비에리의 월드컵 출전의 꿈은 허물어졌다. 2009년 여름, 블랙번의 샘 앨러다이스감독은 2010 남아공월드컵 출전을 위해 프리미어리그에서 플레이할것이라는 가능성을 시사했고 비에리도 마음내키는대로 연습에 참가했지만 도중에 이탈리아로 귀국했다.
비에리는 향후 어떤 길을 걷게될것일까. 프로가 참가하는 포커대회에 출전했다라는 이야기도 있고 파올로 말디니와 공동으로 세운 패션브랜드『Sweet Years』에 전념한다라는 길도 있다. 그럼에도 그가 무엇을 하든 앞으로도 가쉽잡지의 지면을 흔들어줄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는것은 크리스티안 "보보" 비에리라고하는 인물이 매혹적인 인생을 보냈다는것만은 아닐것이다. 그는 이탈리아축구사에 그의 이름을 새긴 위대한 스트라이커중 한명이기때문이다.
출처 : 칼치오2002 2010년 7,8월호 합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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